“네가 영철이냐… 정말 우리 영철이냐.” “예 형님…. 접니다.”
상봉장 도착 전 수십번 되뇌었던 인사말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형제는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남녘의 형과 북녘의 동생은 1974년 2월 이후 꼭 40년 만인 20일 북녘 땅 금강산호텔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만났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홍어잡이배 수원33호를 탔던 동생 영철씨는 4번째 승선 만에 소식이 끊겼다. 백령도 앞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중 수원32호 선원들과 함께 10여명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열린 궐기대회에 참석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부모님은 넷째 아들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셨다.
선득씨는 “20년 전쯤 여동생들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는데 저쪽(북측)에서 거부한다고 했다”며 “이제라도 보게 됐으니 죽어서라도 부모님을 볼 면목이 생겼다”고 말했다. 7남매 중 맏형인 선득씨는 준비해온 부모님 사진과 생필품, 약, 손목시계를 영철씨에게 건넸다. 생면부지의 조카 최용성 목사가 쓴 편지도 영철씨 손에 쥐어줬다.
금강산호텔 상봉장의 다른 테이블. 남측의 동생 박양곤(52)씨가 1972년 12월 고기잡이배를 탔다 소식이 끊겼던 형 양수(58)씨와 42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오대양61호를 탔다 북한 경비정에 나포돼 다른 선원들과 북으로 끌려갔던 형 양수씨도 16살의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초로(初老)의 모습만 남았다. 양곤씨는 “형이 어려웠던 집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배를 탔는데 그게 마지막일 줄을 전혀 몰랐다”고 흐느꼈다.
두 형제는 국민학교(옛 초등학교)를 마치면 농사일을 거들고 땔감을 구하느라 변변히 놀아본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42년간의 아픔에 비하면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양곤씨는 혹시 형이 부모 얼굴조차 잊었을까 하는 노파심에 가족사진 여러장을 준비했다. 추운 북녘에서 따뜻하게 지내라고 옷과 생활필수품 등 선물도 챙겼다.
이들 외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첫날 행사에는 정부에 의해 6·25전쟁 전시납북자로 인정된 북한의 최종석(93), 최흥식(87)씨도 포함됐다. 하지만 모두 사망해 각각 남쪽의 딸 최남순(65)씨와 아들 최병관(68)씨가 북측의 이복형제와 만났다. 납북자 가족 4명을 포함한 남측 상봉 대상자 82명과 동반가족 58명은 북측의 가족 178명과 만나 여러 사연을 나누고 또 나누었다. 남측 상봉단은 2시간에 걸친 첫 단체상봉에 이어 북측이 주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해 만남의 기쁨을 나누고 첫날 행사를 마무리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국민일보 쿠키뉴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