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指鹿爲馬).’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입니다. 교수신문은 지난 8∼17일 전국의 교수 7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1명(27.8%)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사슴(鹿)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부른다는 뜻의 ‘지록위마’를 선택했다고 21일 밝혔습니다.
남을 속여 옳고 그름을 바꾸는 상황을 비유하는 표현인 지록위마는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사자성어입니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가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황제로 세워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뒤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좋은 말 한 마리를 바칩니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곽복선 경성대 중국통상학과 교수는 “2014년은 수많은 사슴들이 말로 바뀐 한 해”라며 “온갖 거짓이 진실인양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말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백 번 동감합니다. 올 한 해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데 지록위마처럼 기가 막힌 표현도 없다고 봅니다.
2014년이 열흘도 안 남은 시점에서 또 한 명의 조고가 나왔으니 바로 ‘땅콩리턴’의 장본인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동생 조현민(사진) 전무입니다. 한진 그룹 오너 3세 3남매의 막내이기도 하죠.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여객마케팅부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언니의 ‘메가톤급 사고’에 말을 아껴 온 조 전무는 지난 17일 마케팅 분야 직원들에게 ‘반성문’ 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제목은 ‘반성문’인데 일부 내용이 가관입니다.
“매일 매주 매월 매년 어제의 실수 오늘의 실수 다시 반복 안하도록 이 꽉 깨물고 다짐하지만 다시 반성할 때도 많아요. 특히 우리처럼 큰 조직은 더욱 그렇죠. 더 유연한 조직문화 지금까지 회사의 잘못된 부분들은 한사람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임직원의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부터 반성합니다.”
모든 ‘임원’이라고만 했어도 기가 덜 막혔을 겁니다. 그런데 ‘직원’도 포함됐습니다.
파문의 시작을 돌아보죠. 힘없는 직원을 상대로 한 그룹 회장 장녀의 비상식적 행동입니다.
이러 저리 생각해봐도 이 상황에 직원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직원이 당시 서비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 만일 이게 근거라면 조 전무는 이 사건의 ‘본질’을 정말 모르고 있습니다.
이후 대한항공의 경직된 문화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조직에서 문화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오고가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이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는 자’는 직책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높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은 권한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직책이 낮은 사람들은 뒤에서 욕을 할 진 몰라도 앞에선 높은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위에서 형성돼 내려 온 사내 기류에 순응하는 자들이지 사내 기류를 형성해 나가는 주체가 못 된다는 겁니다. 되려고 해도 될 수가 없고, 된다 해도 어설픈 수준에 불과합니다.
“모든 임직원의 잘못입니다.” 지록위마도 이런 지록위마가 없습니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