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한국시각) ‘무패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38·미국)와의 세계복싱평의회(WBC), 세계복싱기구(WBO), 세계복싱협회(WBA) 웰터급 통합 타이틀전에서 ‘전설’ 매니 파퀴아오(37·필리핀)가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졌다. 이 경기의 의미를 이렇게 압축해 보고 싶다.
‘권투가 다른 이종격투기나 유도와 같은 경기에 졌다.’
이번 ‘세기의 대결’이 전 세계 권투 팬들에게 실망을 안긴 이유는 공격을 한 선수보다 수비하면서 ‘점수만 더 딴’ 선수가 이기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인파이팅 스타일의 파퀴아오가 완벽한 아웃복싱 스타일의 메이웨더에게 졌다는 사실에 더 이상 격투기 팬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통한다.
남자들 사이에는 ‘경쟁적 공간(competitive space)’이 존재한다.
같은 공간에 남성 둘이 있을 때와 여성 둘이 있을 때는 심리가 다르다. 남성은 경쟁적 심리나 공격성을 가진다. 반대로 여성의 경우는 모성적 심리가 발동한다.
남성의 경우는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위치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독립된 자아(independent self)’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 동성이 타면 자리확보를 하거나 상대방의 몸의 크기와 인상 등을 순식간에 확인하는 타고난 습성을 가지고 있다.
미국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1965년에 ‘근접학(Proxemics)’이라는 개념을 정리했다. 여기에 따르면 사람은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이 있다. 이 영역을 침범당하면 스트레스지수가 높아지고 공격적 성향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도 이와 같은 심리다. 권투하는 공간인 사각의 링은 5x5m의 크기다. 이 사각 링의 크기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도록 의도적인 거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싸움과 스포츠’의 차이를 여성들은 구분하지 못한다. 둘이 싸우면서 피를 흘리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냥 전부 ‘싸움’으로 치부한다. 규칙과 규율을 가지는 영역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싸움과 스포츠가 나눠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권투에서 사각의 링이라는 공간은 합법적인 격투의 공간으로 수컷의 경쟁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유도, 농구, 럭비, 축구 경기장도 전부 사각이다. 네모 안에 원을 그려놓은 레슬링 정도를 제외하면 상대방과 몸싸움을 전제로 하는 경기들은 대부분이 네모의 공간에서 이뤄진다. 만약 이런 규칙과 동일한 공간을 설정하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하는 ‘싸움’이 되는 것이다.
남성들은 스포츠의 격렬함 속에서 나오는 땀을 보면 흥분한다. 그리고 복싱의 경우 종목의 특성상 피도 흥분의 요인이 된다. 피는 붉은 색으로 시각을 자극 할 뿐만 아니라 피비린내 냄새로 후각을 자극한다. 복싱경기장에서는 땀 냄새와 피 냄새가남성 호르몬 분비를 자극시킨다.
하지만 이번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에는 피와 땀 냄새가 진동하지 않았다. 이런 ‘여성적인’ 경기내용에 대해 이미 대중화된 세계 3대 이종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피 냄새와 땀 냄새를 충분히 맡아온 격투 팬들에게는 더 이상 흥분을 선물하지 못하는 경기가 돼 버렸다.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 K-1(가라데·Karate)ㆍ킥복싱(Kickboxing)ㆍ쿵후(Kungfu)ㆍ권법(Kempo)ㆍ격투기(Kakutouki)), 프라이드 FC(RPIDE Fighting Championships) 이런 종합격투기들에 권투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4전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65)씨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역대 타이틀전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경기였다”고 말했다. WBA 주니어플라이급 17차 방어의 신화를 쓴 유명우(51)은 “나도 경기를 정말 재미없게 봤다, 지루한 경기가 돼 버려 아쉽다”고 한숨을 쉬었다.
‘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미국)는 자신의 트위터에 아예 “복싱 팬들에게 미안합니다(Sorry boxing fans)”라고 썼다.
이번 대결로 메이웨더와 파퀴아오가 챙기는 대전료는 ‘2억 5000만 달러(약 2700억원)’이다. 이 외에 출연료, 관람료, 광고료 등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천문학적인 숫자의 권투 팬들과 맞바꾼 돈이라는 걸.
이재연 대신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치료학 교수
정리=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