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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남원 신기마을(지리산 둘레길 운봉~인월 구간) 토성의 느티나무 / 지리산 둘레길 행정마을 개서어나무 자연 군락 / 만추(晩秋)의 지리산 / 경작지 한복판에 자리 잡은 행정마을 개서어나무 숲 / 참빗살나무 열매 / 지리산 둘레길 람천에 깃든 물오리떼(왼쪽)와 왜가리 /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 회화나무 / 남사예담촌 들머리 /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산청 단감 /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을 기리는 남명기념관 /
남원·산청=구성찬 기자
지리산을 수십 번 갔어도 이번처럼 1박2일 동안 등산로에 발도 디뎌보지 않은 채 돌아오기는 처음이다. 당초 시간되면 오랜만에 장당골이나 대원사 코스 초입부터 두세 시간은 걸으려고 했지만, 이틀째에는 가을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첫날인 지난달 12일에는 지리산 둘레길의 남원시 운봉~인월 구간을 걸었다. 13일에는 산청군 운리~덕산 둘레길 구간의 남사예담촌, 덕산~위태 구간의 덕천서원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거처였던 산천재를 둘러보았다. 지리산은 언제나 그 안에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산이다. 이곳의 늦가을 벽돌색 단풍과 단감 철은 이제야 절정이다. 지리산 자락의 옛 마을 숲과 그 주변에 깃들인 사람들의 정취(情趣)를 느껴보기에 적절한 절기가 아닌가.
◇ 많은 사람들을 품어줬고 지금도 품고 있는 산
운봉읍 사무소에서부터 인월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아마도 가장 평탄한 코스인 ‘운봉~인월’ 구간(10.3㎞)은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주로 뚝방길과마을길을 따라간다. 그렇지만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던 이곳 주민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왜구와의 싸움에서 크게 이긴 이성계의 전적을 기리는 황산대첩비, 갑오동학농민전쟁의 격전지였음을 알려주는 토벌비 등이 민초들의 고난을 연상시킨다.
이날 숲길 걷기에는 김영문 전북대 법과전문대학원 교수가 동행했다. 김 교수는 안식년인 2012년 12월부터 1년3개월 동안 지리산과 산자락 마을에서 살았다. 그가 남원시 산내면 달궁마을 근처 동떨어진 집에 처음 둥지를 틀었을 때에는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았다고 한다.
“TV도, 인터넷도 없이 살다 보니 주말만 되면 서울이나 전주로 달려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절대 고독 속에서 한동안 몸부림치고 나면 몸은 자연스레 책상 앞으로 향했고, 그 시절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문을 썼다.”
김 교수는 벽소령 깊은 산 속 움막에서도 3개월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지리산 속 어디에선가 세상과 소식을 끊고 사는 사람들이 1만5000명가량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물론 확인할 수 없는 수치다. 하지만 지리산의 역사와 인문지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67년 이후 지금까지가 지리산 역사상 가장 적은 규모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지리산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품어줬던, 지금도 품고 있는 산이다.
지리산은 비교적 높은 곳까지도 물이 풍부해서 산 속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남한 내 거의 유일한 산이다. 화전민도 천석(千石)을 할 정도라는 말이 전해진다. 지리산의 품속에서 마한이라는 왕국이 통째로 피난해 살기도 했다. 동학 농민군, 왜란시절과 구한말의 의병, 한국전쟁 후 빨치산 등 지리산은 한반도 역사의 굴곡마다 은둔과 도피, 의거와 반역의 터전이었다. ‘불복산(不伏山)’이라는 지리산의 별명은 이곳 사람들이 이성계의 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반역의 일화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 마을을 살리고 지켜준 지리산의 숲
철새와 수달이 즐겨 찾는 람천의 뚝을 따라 1·2㎞ 걸어가면 신기마을이다. 신기리 마을숲은 숲이라기보다 들판에 쌓은 토성이다. 1748년 산줄기가 끊어져 지맥이 약하다는 지관의 말에 따라 폭 5m, 길이 53m, 높이 7m로 토성을 복원하고, 그 위에 느티나무 묘목을 심었다. 그 느티나무들이 지금 거목이 됐다. 큰 개체는 가슴높이 둘레가 3m 정도에 이른다. 동네 주민인 한 할아버지는 “지대가 낮아서 비 오면 물이 잘 안 빠졌기 때문에 들판에 토성을 쌓았다”고 말했다. 김영문 교수는 지리산 은거 수개월 만에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동무, 술친구가 됐다. “할머니들이 교수가 무엇인지 몰라서 선생님이라고 말해야 알아듣지만, 그분들 얘기를 듣다 보면 재미있고, 인생 공부도 된다”고 말했다.
운봉읍 행정리의 마을숲은 언뜻 보아 주변 풍경과 동떨어져 있다. 수령이 100년을 훌쩍 넘었을 아름드리 개서어나무 90여 그루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 논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숲의 규모는 작지만 안에 들어서니 여름에는 햇빛을 온통 가리는 천연 에어컨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어나무나 개서어나무는 원래 숲의 천이단계에서 마지막인 극상림에서 군락을 이룬다. 숲 입구의 안내판에 따르면 행정마을 주민들이 약 180년 전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라고 한다.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마을숲’ 전국대회 대상을 차지했다. 행정마을 자체가 사방이 확 트여 겨울이면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곤 했는데 비보림이 이런 바람과 하천범람으로부터 마을 지켜 왔다는 것이다.
◇ ‘물을 보고,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
이튿날 남사예담촌 안에 있는 이호신 화백의 집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활동해 왔던 화백은 2010년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정겨운 돌담 위로 주렁주렁 많이도 열린 단감들이 비를 맞아 더욱 먹음직스럽다. 돌담들은 들쭉날쭉 뻗은 나무 가지를 피해 낮아졌다가 에둘러 가기도 한다. “풍경은 부분이고 산수는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발품을 무지하게 팔아야 한다. 요즘 스마트폰과 디지털 카메라에 많이 의존하지만, 편하면 안 된다. 거기에 사색을 덧붙여야 작품이 나온다.” 이 화백이 30여 년 간의 배낭여행과 숱한 스케치 답사를 통해 체득한 진리다.
이 화백의 안내로 남사마을의 유명한 고목들을 살펴봤다. 600살 된 감나무는 지리산을 숱하게 오르고 내린 기록을 남긴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증손자 하연(세종때 영의정)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나무 밑동은 대부분 비어 있어 고사목 같지만, 신기하게도 많은 감이 열렸다. 그밖에도 X자 모양으로 엇갈려 자라서 ‘부부나무’라는 별명을 지닌 회화나무 두 그루(300살 추정), 680세로 고사한 매화나무 고목, 원정매(元正梅) 등에서 이 마을에서 살다 간 선비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지리산과 그 자락 마을을 한국적 정서로 표현해 ‘지리산 화가’로 통하는 이 화백은 남명 선생의 ‘물을 보고,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 처사들의 여행지, 그들을 품은 넓은 산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쫓아 산천재로 발길을 돌렸다. 비가 내리는 산천재에서 천왕봉은 보이지 않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완공을 앞둔 선비문화관이 압도적 규모로 풍광을 지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숱한 유학자들이 3~25일에 걸쳐 두류산(지리산의 옛 이름)을 오르고 그 기록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치영 교수에 따르면 기록을 남긴 22명의 지리산 여행자 가운데 조식, 남효온을 비롯한 13명은 일생 동안 관직과 거리를 둔 선비, 즉 처사들이었다. 이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국가의 중대사에는 상소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으며,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앞장서는 등의 공통점을 지녔다. (‘사대부 산수유람을 떠나다’)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지리산 유산기(遊山記) 중 단연 백미에 해당된다. 그는 지리산 유람을 통해 아름다운 산수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살았던 사람을 보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시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지금의 시대를 통찰하려 했다. 자연경관에 심취하기보다 그 속에서 살다간 세 사람, 한유한(韓惟漢), 정여창(鄭汝昌), 조지서(趙之瑞) 등 세 군자를 떠올렸다.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그 속에 살던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 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언짢은 생각으로 바뀌어버렸다. 훗날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로 와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조식, ‘유두류록’, 강정화 등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에서 재인용)
◇ 행동으로 이어진 통찰, 역사가 기억하는 절개
깊은 통찰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조식은 1555년 조정으로부터 단성현의 현감 자리를 제안받자 이를 고사하고 당시 임금(명종)에게 재야인사로서의 고언을 담은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곧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臣)이 낮에는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이 탄식하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며 흐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식은 상소문에서 대비(문정왕후)를 ‘구중궁궐의 한 과부’, 국왕 명종은 ‘돌아가신 왕의 외로운 아들일 뿐’이라며 국왕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진언했다. 실로 목숨을 건 진언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명종은 대노해서 남명을 죽이려 했으나 승정원과 유생들의 반대 때문에 포기했다. 누가 진정한 충신이었나. 임진왜란 당시 임금과 고관들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왜병과 맞서 피를 흘리며 싸운 의병대의 지도자 혹은 조력자의 상당수, 즉 성여신, 박여량 등은 조식의 제자였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 역사의 가장 큰 교훈은 사람들이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되나 보다. 국정교과서 강행 등 박근혜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운영과 헌법 무시행위에 대해 지금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비구름에 가린 천왕봉 앞에서 남명 선생이 느꼈을 비분강개와 대쪽같은 절개를 떠올리며 오늘 이 무기력감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남원·산청=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