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해운대 교통사고, ‘익명의 살인자’ 안전불감증의 민낯

[친절한 쿡기자] 해운대 교통사고, ‘익명의 살인자’ 안전불감증의 민낯

기사승인 2016-08-03 09:03:38

지난달 31일 부산 해운대 인근 교차로에서 한 차량의 광란의 질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또다시 ‘안전 불감증’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사고차량을 몰던 K씨(53)가 뇌전증을 앓고 있던 것으로 밝혀지며 현행 운전면허 검증제도의 허점이 문제로 부각됐습니다.

K씨는 푸조를 타고 중앙선을 침범해 횡단보도를 막 건너던 보행자와 차량 6대를 잇달아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보행자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운전자 K씨 등 14명이 부상을 입었죠. 사망자 중 2명은 휴가차 해운대를 방문한 어머니와 아들 관계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경찰은 사고 직후 조사를 벌였지만, K씨가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인명피해를 낸 것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심각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K씨가 뇌전증을 앓고 있었는데, 운전면허가 무리 없이 갱신된 겁니다.

뇌전증은 뇌에서 생기는 일종의 질환으로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에 이르게 하는 증상을 일컫습니다. 이로 인해 의식의 소실이나 발작, 행동의 변화 등 뇌기능의 일시적 마비증상이 나타나죠. 뇌전증은 단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경련을 일으키거나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운전면허 결격 사유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병입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K모씨는 지난해 9월 뇌전증 진단을 받고 하루 2회씩 약을 복용해왔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일엔 “약을 먹지 않았다”고 진술했죠. 이를 근거로 경찰은 사고 당시 정신을 잃고 가속페달을 밟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고 있습니다.

K씨는 운전면허를 취득·갱신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1993년 2종 보통면허를 취득한 K씨는 2008년 1종 보통면허로 변경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뇌전증 진단을 받고도 올해 7월 면허갱신을 위한 적성검사를 별 문제없이 통과했습니다. 면허시험장 적성검사 당시 K씨는 시력, 청력 등 간단한 신체검사만 했을 뿐 면허 결격 사유인 뇌전증에 대한 진단은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K씨는 버젓이 차를 몰고 다녔고, 이번과 같은 대형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현행 운전면허시험 과정에서는 응시자가 병력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뇌전증과 같은 심각한 병명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면허취득 과정에서 ‘부적격 대상’으로 간주되는 주요 질병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진신고에 의존하고 있죠.

물론 부적격자를 가리는 ‘형식적인’ 절차는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등의 기관은 운전면허 결걱 사유 해당자인 정신질환자, 마약·알코올 중독자 등을 도로교통공단에 보내 수시적성검사를 합니다. 마약·알코올 중독자의 경우 대체로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데 반해 정신질환은 입원기간이 6개월 이상이어야만 관리대상에 포함됩니다. 더구나 뇌전증 환자는 병무청을 제외하고 통보의무도 없습니다. 전역 후에 뇌전증을 앓게 된 K씨의 경우 운전면허 적격검사 그물망 밖에 있는 셈입니다.

부산 해운대구갑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우리나라는 중증 치매나 뇌전증 등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운전면허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번 사고는 사실상 국가적 방치 상태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사고”라고 지적했습니다.

사건 후 경찰은 운전면허 수시적성검사 대상인 뇌전증 환자의 검증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법령 개정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뇌전증 환자뿐 아니라 중증 치매, 기면증과 같이 검증 사각지대에 있는 질환에 대해서도 충분한 검토를 통해 적격여부를 면밀히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명사고가 난 다음에야 대책을 내놓는 뒷북행정은 단지 칼 든 사람만 없을 뿐, 거리를 버젓이 활보하는 살인자를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안전 불감증은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줄타기입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내재돼있는 ‘제도적 살인자’를 기민하게 색출해내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다니엘 기자 dn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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