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양균 기자] 뼈만 앙상한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가망이 없다. 그랬던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물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기적이었다.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치료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는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에볼라가 거둬간 목숨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모든 죽음은 고통스럽다. 아이의 죽음은 더욱 그렇다. 의료진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이 아이는 어떤 잘못을 한 걸까.’ 질문의 답은 하나다.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난 죄.’
정상훈(46·에볼라 구호 의사·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전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 위원장은 이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내전과 그로인해 피폐해진 국토. 빈곤과 기아는 필연적인 것 마냥 되풀이되는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젊은 한국인 의사는 고민에 빠졌다.
에볼라 창궐 현장과 빈곤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하면 할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결핵 감염자의 사연은 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환자는 끝내 치료받길 거부했다. 결핵에 걸린 사실이 알려지면 시부모가 자신을 내쫓을 것이라고 했다. 자식과 생이별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는 환자 앞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환자는 정 위원장에게 일자리를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사정은 딱했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십대 초반이나 됐을까. 환자의 양친은 에볼라로 목숨을 잃었다. 정 위원장은 이 청년이 과연 지금까지 살아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듯 참혹한 구호 현장을 자청해 떠난 진짜 이유를 사실은 그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의사이니까요. 의사이기 전에 사람이니까요.” 사람을 구하고자 이역만리 타지에 갔지만 살린 사람보다 살리지 못한 환자가 더 많았다. 젊은 의사의 고뇌는 죄책감으로, 이는 다시 고통이 돼 가슴을 후벼 팠다.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의식이라고 본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이를 정 위원장에게 대입하면 꼭 맞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관계를 맺고 발버둥 쳤지만, 정작 변한 건 그 자신이었다. 시에라리온의 두 살 여아에게 느낀 무기력함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결심으로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고 끝에 결심한 것이 정치로의 투신이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한국의 현실은 아프리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리에서 혹은 고공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이어가는 이들에게서 그는 시에라리온의 아이를 떠올린다. 아프리카보다 마음의 고통은 더 깊어졌다. 정치 활동을 열성적으로 해봐도 당장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 걸까요?” 고민의 해결은 아직 요원하다. 그의 내면에서 때때로 의사와 활동가, 정치인이라는 서로 다른 외피는 격렬하게 충돌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여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마흔 여섯. 맘만 먹으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로, 두 아이의 아빠로, 그리고 살가운 남편으로만 살 수도 있었다. 말쑥한 양복과 구두 대신 주름지고 먼지 묻은 청바지와 운동화를 선택한 건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후회는 없다.
◇ 무지가 공포를 키운다
16일 정상훈 씨를 만나기 전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에서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에볼라가 재발해 3명이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민주콩고는 지난 2014년에도 같은 이유로 5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에볼라가 맹위를 떨쳤던 당시 서아프리카 일부 국가에는 의료진이 부족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희생된 상당수의 아프리카인들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은 냉랭하다. 통계 수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에볼라에 대한 공포심은 상당하다. 물론 에볼라 자체가 치명적인 감염병인건 사실이지만 두려움은 비정상적으로 부풀려져 있다.
2014년 당시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말리,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 에볼라가 창궐하자 국내에선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자행됐다. 대한항공은 안전을 이유로 인천에서 케냐 나이로비를 잇는 직항 노선을 무기한 휴항해 버렸다. 당시 상황을 두고 주한케냐대사관의 모하메드 겔로 대사는 “케냐는 동아프리카에 속한 국가이고, 서아프리카까지의 거리는 유럽에 이르는 것보다 멀다”며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정상훈 위원장은 “방역 당국이 에볼라를 대하는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보건당국은 에볼라의 국내 유입 원천 봉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정확한 정보의 전달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유입을 완벽하게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더러 에볼라를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피부색이 검고 못 사는 나라로부터 유래된 전염병’이라는 인식은 무지를 조장하는 한편 두려움의 대상을 타자화 하는 대단히 위험한 프레임입니다.”
최근 민주콩고의 에볼라 재발 소식이 전해지자 질병관리본부는 부랴부랴 방역 대책을 발표했지만 대중의 신뢰는 그리 높지 않다. 정 위원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불신은 메르스 사태 당시 드러난 보건당국의 무능과 비밀주의를 목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 당시 정부는 겁에 질렸습니다. 당국자들의 당시 공포와 두려움은 보호해야할 국민들을 위험으로 내몰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던 겁니다.”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메르스 초기 감염 정보를 숨긴 것은 도리어 감염의 확산을 부채질했다는 해석이다.
실제 메르스 백서에는 정보공개가 지연된 것과 관련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상훈씨는 새로운 방역 시스템 설계를 위해서는 메르스 사태의 전말에 대해 명명백백한 정보공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정보 민주주의의 실현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에볼라 등 감염병 대응에 취약한 이유가 현행 의료 제도가 가진 한계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무리 방역체계를 잘 구축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구심점 역할을 할 공공 의료기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체 의료기관의 95%는 민간에 있습니다. 상황 발생 시 공중보건과 의료기관의 영리행위는 충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방역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공공 의료기관의 확충이 시급합니다.”
정 위원장은 에볼라 재발 위험성을 재차 경고했다. 쉽게 변이되는 바이러스의 특성상 치료제가 개발되기도 전에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고, 국가 간 이동이 잦은 추세를 반영할 때 확산 속도도 이전보다 더 빨라질 것이란 설명이다.
그는 ‘발본색원’이야말로 에볼라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본다. “에볼라 바이러스의 국내 유입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의료진과 자원을 투입해 현지에서 에볼라 감염을 막아야 합니다. 동시에 아프리카의 낙후된 보건 위생 환경을 개선시키는 것도 병행돼야만 합니다.”
◇ 700번째 의료진이었을 뿐…
에볼라 구호 활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언론은 ‘한국인 최초 에볼라 구호 의사’로 정상훈 위원장을 조명하기에 바빴다. ‘왜 사지에 갔느냐’는 질문은 종종 그를 힘들게 했다. “시에라리온에 파견됐을 때 전 단지 700번째 의료진이었을 뿐입니다. 숱한 의료진이 저보다 앞서 에볼라 창궐 지역에 자진해서 떠났습니다. 고작 700번째로 간 것이 무슨 대단한 희생인 마냥 비쳐지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당시 환자 중 일부는 살릴 수 있었지만 늘어나는 감염자들을 전부 감당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일개 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부채의식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세상을 바꾸면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오늘도 이 물음(혹은 믿음)을 가슴에 품고 산다.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