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⑥ "너무 배고파 개밥까지" 94세 피해자의 눈물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⑥ "너무 배고파 개밥까지" 94세 피해자의 눈물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사승인 2017-08-14 06:00:00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민수미, 박효상 기자] 내 나이 아흔넷. 

망백(望百)의 나이도 지나 인생의 고난에 초연해질 나이지만 가슴 속 응어리는 녹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국가도 가족도 말이다. 내 삶은 지금도 열일곱, 일본에 끌려갔던 그 시절에 멈춰있다. 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상주다. 

1940년, 당시 충남 보령 군청 노무계 직원들이 차출 명단을 들고 와 소리쳤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정 기간 기술을 습득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배를 곯은들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싶은 이가 어디 있을까. 그것도 일본이다. 가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네가 가지 않으면 네 형이라도 붙잡아 가겠다”는 노무 담당관의 위협에 결국 난 일본으로 끌려갔다.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탔다. 배 1층에는 조선인이 가득했다. 서산, 당진 사람도 만났다. 주먹밥 하나, 단무지 한 쪽, 소금물로 6일을 연명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에 위치한 가마이시 제철소였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했다. 광산에 가서 광석 채굴을 하고 제철소에서 철을 만들었다. 17살의 소년이 하기에는 모두 가혹한 일이었다. 힘들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철은 너무 뜨겁고 무거웠다. 


그렇게 일해서 받은 돈이 7원. 제철소 근처 팥죽 집이 있었다. 그곳 팥죽 한 그릇이 5원이었다. 한 달을 울면서 일해야 팥죽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 남은 2원은 쓸 곳도, 쓸 시간도 없었다. 많은 조선인이 죽었다. 죽음을 지켜보며 또 일해야 했다. 고향이 그리웠다.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일본으로 끌려오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부모님을 계속 상상했다. 그러니 가족이 그리울 땐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국은 어느 방향일까' 매일 생각했다. 귀국 조치는 2년 후에나 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망가지고 주머니는 비었지만, 가족과 만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상관없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영장이었다. 서울 용산에 집결해 3일을 묵었다. 이후 화물차에 실려 8일 동안 길을 떠났다. 도착해보니 중국이었다. 나는 일본인을 대신해 팔로군(중국군)과 싸워야 했다.

교전은 비일비재했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광경을 매일 봐야 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도 부상과 싸워야 했다. 발을 다쳤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혼자 치료하라며 던져 준 것이 성냥이었다. 성냥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과 팔로군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된장국, 단무지 두 조각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하루는 보초를 서다 개밥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군이 배식소 옆에서 키우던 셰퍼드의 밥이었다. 우리도 못 먹는 흰 쌀밥을 개는 먹었다. 누군가가 개밥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자루를 들고 뛰었다. 개 밥그릇에 있던 밥을 두 손으로 퍼 자루에 담았다. 개는 짖어댔고, 일본인 상관에게 그 모습을 들켰다. 그가 어딘가에 있던 삽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삽은 그대로 내 볼을 치고 지나갔다. 귀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고막이 나갔다. 나는 지금도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탈영도 쉽지 않았다. 모의는 했으나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죽고 싶었다. 차라리 그편이 편할 테니 말이다. 밥을 실컷 먹고 싶었다. 잠도 실컷 자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걷고 싶었다. 그 어떤 조그만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끌려다니다 해방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라는 생각에 기쁨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만세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일본은 해방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일본군 속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 누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판별할 수 없었다. 

나는 억울하다. 내 청춘은,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젊음을 다른 나라에 바쳤다. '그래, 나만 겪은 일이 아니니 이해하자'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일본만큼 나에게 상처를 준 모국 때문이다. 1965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동원 당시에도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던 정부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 돈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맞바꿨다. 지금도 우리를 기억해주려는 노력은 없다. 나는 대한민국에 속았다. 

-본 기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상주씨와 그의 가족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민수미 기자
min@kukinews.com
민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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