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은 ‘강요받다’를 ‘억지로 어떤 일을 할 것을 요구받다’고 정의한다. 다음의 예시는 이 말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부금 및 각종 회비를 강요받다’, ‘타 직종 및 권한 밖 업무를 강요받다’, ‘병원 물품 구입을 강요받다’, ‘성폭력 피해 사실의 침묵을 강요받다’ 등. 강요하는 쪽에 ‘병원’을, 강요당하는 편에 ‘병원 노동자’를 넣으면 현재 우리나라 의료계의 노동 실태를 꼬집는 말이 된다. 그리고 전국의 병원에선 오늘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노동 실태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하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나순자)은 올해 병원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에 대해 ‘병원 노동권은 인권 침해 수준’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응답자들은 병원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강요에 대해 ▶갑작스런 근무시간 변경 48.2% ▶휴가 강제사용 48.1% ▶휴가 및 휴직으로 인한 인력 공백 부족에 따른 인력 미충원 46.6% ▶본인의 업무가 아닌 업무강요 38% ▶권한 밖 타 직종 업무수행 강요 34.1% ▶병원물품 구입 강요 33.8% ▶기부금 및 각종 회비 강요 29.3% 등을 꼽았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병원 직원의 80%는 이직을 고려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감정노동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감정노동의 주된 원인은 폭언(66.2%), 폭행(11.9%), 성폭력(13.3%), 직장 괴롭힘(19.2%)이었다. 특히 의사나 환자 및 보호자로부터의 폭언 및 폭행, 성폭력의 피해경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정부는 성폭력 문제에 강경한 대처를 예고하고, 관련 법령과 정책을 속속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기관 노동자들은 이러한 변화에서 사실상 소외되어 있는 형편이다. 실태조사에 응한 응답자들의 대부분은 피해를 당해도 참고 넘기고 있었다.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들도 80% 이상은 속으로 삭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병원은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70%를 상회하는 곳이다. 그렇지만 임신·출산·육아에 대한 모성보호는 매우 열악한 수준이다. 보건의료노조는 최근 3년 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응답자 6163명을 대상으로 ‘임신결정의 자율성’을 조사한 결과 ‘참혹한 수준’이라고 결론지었다.
응답자의 34.1%는 ‘임신결정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동료에게 업무가 가중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24.4%는 ‘부서 내에서 눈치가 보여서’라고 답했다. 인력 부족으로 ‘임신순번제’ 등의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임산부 보호를 위해 모성보호제도를 4년여째 시행하고 있다. 임산부에게 하루 2시간의 근로시간을 단축한 것이나 초과근무 및 야간근무를 금지한 것은 법이 정한 결정이지만, 병원 소속 여성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마찬가지다.
병원 여성 노동자 중에서 임신 12주내 36주 이후에 있는 임신부가 1일 근로시간 2시간 단축을 사용한 사례는 불과 11.4%였다. 출산 전·후 휴가 90일을 모두 사용한 사례는 66.7%였으며, 배우자의 출산휴가 사용은 25.1%로 조사됐다.
아울러 병원 노동자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상당한 업무 강도를 소화하고 있었다. 임신 중 초과근무를 한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33.2%에 달했고, 야간근무 경험도 16.6%나 됐다. 설상가상 유(사)산을 경험한 응답자도 115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사)산을 했음에도 법정 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비율도 31.3%였다.
보건의료노조는 앞서 거론한 사례들을 ‘병원 갑질’로 규정한다. 노조는 “수년간 자행되어 온 병원 갑질은 이제 병원 스스로가 뿌리 뽑아야 한다”며 “병원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이 존중되어야 환자에게 질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병원도 발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병원 조직이 건강할수록 그 안에서 일하는 많은 보건의료노동자들도 건강하고 환자도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며 보건당국과 병원의 전향적인 태도변화를 요구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