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은 밤새 아팠다. 자대로 전입한 지 한 달 여 만이었다. 고열은 일주일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앓아누운 그를 대신해 잡무를 맡은 건 그의 맞선임이었다. 선임은 이등병을 간호하는 데에도 지극정성이었다. 이등병은 생각했다. ‘평생 이 선임을 모셔야겠다’고. 국방부 홍보지원단 홍보지원대에서 동고동락한 가수 박효신과 작곡가 정재일의 이야기다.
박효신과 정재일은 ‘소울메이트’다. 두 사람 모두 10대 시절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정작 서로를 처음 만난 건 서른 살이 넘어서였다. 2010년 12월 강원도 춘천 102보충대에 입소해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박효신은 홍보지원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불교 군종병으로 복무하다가 홍보지원대로 전입해온 정재일이 그의 맞선임이었다. 전쟁 중에도 꽃은 피는 것처럼, 군대에서도 이들은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병장이던 그룹 다이나믹 듀오 멤버 개코의 결혼을 앞두고 분대원들이 개인 시간을 쪼개 만든 축가는 온라인에서도 크게 화제가 됐다.
두 사람의 인연은 군대 밖에서도 이어졌다. 2014년 3월 발표한 ‘야생화’가 그 시작이었다. 이 곡의 탄생엔 재밌는 비화가 있다. 정재일의 집에서 함께 작업을 하던 때의 일이다. 애주가로 소문이 난 정재일은 이날도 와인을 마시며 박효신과 얘기를 나눴는데, “형은 야생화 같은 사람이야”라는 의미 모를 말을 남기고 잠들었다. 박효신은 정재일의 말을 곱씹다가 ‘야생화’의 첫 가사를 쓰게 됐다. 전 소속사와의 분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박효신은 이 노래에 자신의 시련과 극복에의 의지를 담아냈다. 6분이 넘는 대곡인데다 대중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전개였지만, 노래는 즉각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박효신은 이 노래로 자신의 음악 인생에 전환점을 맞았다.
마찬가지로 정재일과 함께 만든 박효신의 정규 7집은 그의 인생을 담아낸 역작이다. 12곡, 약 60분간 박효신은 감정의 마천루를 여러 번 오르내린다. 지난해 낸 ‘겨울소리’나 ‘별 시’(別 時)는 한 편의 서정시다. 정재일은 박효신이 7집 발매를 기념해 연 공연에서도 음악 감독을 맡았다. ‘네가 내 옆에 있다면 난 날아오를 수 있어(if you are there beside me I fly high)’(‘홈’ 가사 中) 박효신의 메시지는 정재일이 지휘하는 밴드의 호위를 받으며 관객들에게 날아들었다.
꿈같던 시간을 뒤로 하고, 박효신과 정재일은 지난해 프랑스로 떠났다. 100년 넘은 고택에 피아노와 마이크, 각종 장비를 펼쳐 놨다. 슈퍼마켓 한 번 가기 어려운 ‘깡시골’에 머무르며 두 사람은 침잠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 17일 방송한 JTBC ‘너의 노래는’을 통해 공개된 모습이다. 정재일의 기타 연주에 맞춰 박효신이 ‘겨울소리’를 부르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은 마치 요술을 부린 것 같다. 잔잔하다 못해 고요했던 이날 방송이 이후 떠들썩한 반응을 불러온 건, 두 사람의 교감이 남긴 여운이 짙기 때문일 게다.
박효신과 정재일은 40일 가까이 프랑스에 머무르며 10여개의 노래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낮은 하늘과 그 아래로 보이는 풍경,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와 말, 마당에 있는 오래된 나무와 그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눈을 떠 마주하는 모든 게 영감이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박효신의 정규 8집에 실린다. 아쉽게도, 음반 발매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