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 투 더 99] 댓글로 보는 ‘온라인 탑골공원’

[빽 투 더 99] 댓글로 보는 ‘온라인 탑골공원’

댓글로 보는 ‘온라인 탑골공원’

기사승인 2019-09-11 08:00:00

새천년을 눈앞에 둔 1999년, 우린 모두 미쳐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근거한 ‘종말론’은 막연한 불안감과 찰나적 향락주의를 불러왔고, 새로운 천년을 향한 묘한 기대와 기발한 상상이 뒤엉켰다. 대중음악 시장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는데, 아이돌 그룹의 댄스 음악부터 발라드, 록, 힙합, 심지어 트로트까지 장르를 막론한 음악이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최근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불리는 유튜브 SBS ‘인기가요’ 스트리밍 채널을 통해 1999년 한국 대중음악 시장을 돌아본다. (기사에 등장하는 댓글은 실제 누리꾼이 작성한 글을 각색한 것이다)

↳Re “스티브유 내한공연” “군대만 갔어도…”

가수 유승준의 별명은 한때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춤과 노래 실력이 모두 빼어난 데다가, 여러 선행과 봉사활동으로 청소년들의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그는 ‘스티브 유’로 불린다. “군대에 꼭 가겠다”고 공언해오던 유승준이 200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병역 의무를 면하자, 분노한 국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1999년은 유승준의 전성기였다. ‘열정’, ‘슬픈 침묵’, ‘비전’, ‘연가’ 등 내놓은 노래는 모두 히트했다. 인기는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20년 뒤, 추억을 즐기는 이들에게서조차 그는 환영받지 못한다. 야유와 조롱, 한줌의 안타까움만 남았다.

↳Re “장첸소년단” “재민이 패밀리”

1999년은 그룹 지오디가 등장한 해다. 당시 보이그룹 시장은 H.O.T.와 젝스키스의 2파전, 혹은 여기에 신화를 더한 3파전으로 기억되는데, 앞선 세 팀보다 다소 늦게 데뷔한 지오디는 ‘오빠 부대’로 표현되는 10대를 넘어 전 세대의 사랑을 두루 받으며 판을 흔들었다. 지오디가 ‘국민 그룹’으로 발돋움한 데는 이들이 한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서 키운 ‘재민이’의 공이 크다. 예능에서의 친근한 모습과 대중적인 기호의 음악은 신비주의 성향이 강하던 당대 보이그룹과 차별화를 이뤘고, 덕분에 지오디는 2000년대 초반까지 범국민적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Re “탑골 씨스타”(베이비복스)
↳Re “탑골 투애니원”(디바)

‘걸크러쉬’라는 단어가 대중문화에 처음 등장한 건 201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지만, 1999년에도 ‘걸크러쉬’로 표현될 수 있는 여성 그룹은 많았다. 지금은 배우로 활동 중인 윤은혜, 간미연, 심은진 등이 소속된 그룹 베이비복스와 ‘센 언니들’로 불리는 그룹 디바가 대표적인 보기다. 베이비복스는 1999년 ‘겟 업’(Get up)으로, 디바는 ‘고리’(Yo Yo)로 활동했는데, 비슷한 시기 S.E.S.와 핑클이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를 강조했던 것과 달리, 성숙한 매력으로 소구한 것이 특징이다.

↳Re “죽은 비둘기가 왜…”(코요태 ‘만남’)
↳Re “조선메탈” (염라대왕 ‘카르마’)

‘죽어서도 행복한 비둘기처럼~ 그냥 지금 이대로 멈춰서요~’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익숙한 멜로디지만 가사를 곱씹으니 뭔가 이상하다. 죽어서도 행복한 비둘기라니. 혼성그룹 코요태가 1999년 공개한 ‘만남’의 이야기다. 난해한 가사는 코요태와 함께 혼성그룹 전성기를 이끌던 쿨의 노래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다른 남자 품에 안긴 널 봤다’는 남자와 ‘잠시 어지러워 기댄 것 뿐’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애상’(1998)이나 ‘너와 같이 살고 싶지만 자꾸 다른 사람이 눈에 띈다’는 ‘점보맘보’(2001)의 가사 내용은 그야말로 ‘막장드라마’다. 이 분야 ‘끝판왕’은 록밴드 카르마가 1999년 발표한 ‘염라대왕’. 죽음 앞에서 재물은 무의미하니 공덕을 쌓자는 내용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헤비메탈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가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Re “사제 vs 무당”
↳Re 탑골 레이디가가

파격적이다 못해 엽기적인 콘셉트로 호응을 얻은 그룹 노라조가 ‘세기말’에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누리꾼들은 “당시와 비교하면 노라조는 평범한 축”이라고 입을 모은다. 글자 그대로 ‘대체 불가’한 개성으로 중무장한 가수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인데, 가수 이정현이 대표적이다. 새끼손가락에 단 마이크와 부채를 트레이드마크로, 온갖 콘셉트를 소화했다. 1999년 ‘와’로 활동할 당시 그는 무당을 연상시키는 의상으로 무대에 섰다. 매번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는 가수 김장훈과 화려한 모습의 이정현이 1999년 12월 ‘인기가요’ 1위 후보로 지목돼 나란히 서자, 댓글 창엔 김장훈을 ‘사제’에, 이정현을 ‘무당’에 비교한 댓글이 줄을 이뤘다. 결과는? 한국 토속신앙, 아니, 이정현의 승리였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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