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고?(Ⅱ)
안양대학교 안용환 석좌교수/박사
개인이나 사회나 나라는 전통정신과 승계정신을 갖고 있다. 안익태 작곡 애국가는 이승만 정권과 또 제헌국회에서, 박정희 정권과 김영삼 정권에서 통일될 때까지 보존돼야 한다고 정책화 승계되도록 강조했다.
또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임시정부에서 안익태 곡 애국가를 공인했고 사용허가를 국무회의에서 허락했으며 김구 주석이 친필로 서명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과 학계에서 애국가를 새로 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대단히 잘못된 주장이다.
<역대 정부와 음악협회의 애국가 공인>
1) 이승만 정부
1948년 9월 9일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제61차 본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이 의결했다.
지금 국기와 국가를 새로 제정하는 것은 결국 통일에 지장을 주어 분단을 영구히 할 우려가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남북 전 민족의 의사로 제정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논의를 통일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 정부도 새 국가 제정을 통일 후로 미뤘다.
정부 수립 당시부터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된다는 일부 여론이 있었으나 남북통일 뒤로 미루자는 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중단시켰다. 이 대통령은 안익태에게 그의 국가적인 공로를 인정해 1955년 문화훈장 제1호를 수여했다. 안익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코리아 환타지’ 자필 악보를 선물했다.
2) 박정희 정부
박정희 정부도 새 애국가 제정을 반대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7년 문화공보부를 통해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애국가는 지난 40여 년 동안 국민과 밀착되어 민족과 국가를 상징해 왔으므로 새 애국가를 제정한다면 혼란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고 밝혔다.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민족으로 얼룩진 애국가(안익태 곡)만큼 공감을 줄 수 있는가는 의문시되고 있다는 뜻도 밝혔다.
3) 김영삼 정부
김영삼 정부도 새 애국가 제정을 반대했다.
1936년 안익태의 애국가는 구한 말 자주의식의 태동과 함께 불리기 시작해 일제 강점기 등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수난을 같이 하면서 국민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사실상의 국가로 자리잡게 된 경우다.
김영삼 정부는 애국가가 법률로 공식 지정되지 않은 것은 결코 곡조나 가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따라서 현행 애국가는 국경일 경축식, 외국 국빈 방한행사 등 정부의 공식적인 의전행사는 물론 각종 국제경기대회 등 국내외 크고 작은 행사에서 국가로 널리 불려오고 있으므로 정부에서는 앞으로 이를 바꾸기보다는 국민들이 더욱 애창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4) 한국음악협회의 인정과 예술인들의 증언
한국음악협회(회장 조상현)는 1997년 1월 26일 새 국가 제정건의를 위해 총회를 소집했으나 대부분 회원들이 저항에 회의조차 열지 못했다. 당시 1000여명 회원 중에서 불과 20여명만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다. 결국 대부분 음악인들이 안익태 애국가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사를 나타냈던 일화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음악협회는 더 이상 애국가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는 공문을 정부로부터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65년 발행된 ‘음악생활’ 창간호에는 안익태 추모 특집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 속에는 안익태 생전 개인적 교분을 나눈 예술가 6인의 증언이 담겨 있다.
작곡가 김동진(1913~2006)을 필두로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소프라노 정훈모(1909~1978), 숙명여대 교수를 지낸 작곡가 박태현(1907~1993), 시인 겸 외교관이던 박태진(1921~2006),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피아니스트 김원복(1908~2002), 음악평론가 이성삼(1914~1987) 등 쟁쟁한 예술인들은 하나같이 안익태에 대해 친일은커녕 극일적(克日的) 성품과 행적을 나타냈다고 증언했다.
<안익태 작곡 애국가와 임시정부 법통>
우리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헌법 정신을 따르면 안익태 곡 애국가도 통일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익태 작곡 애국가를 사용하기로 1922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친필과 중경 임시정부 발행 ‘한국애국가’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임시정부는 해방 이후 안익태의 애국가를 곧바로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한국애국가’라는 제목으로 1945년 11월 21일 중경에서 음악월간사가 안익태의 애국가 초판을 낸 것이다. 김구 주석의 얼굴을 크게 싣고, 뒷장에 안익태의 애국가 악보와 함께 한국어·영어·중국어 가사를 싣고 있다.
임시정부가 중국 중경에 있었던 마지막 5년간이 조직과 청사 및 군대를 갖추고 나름대로 활동하였던 시기였다. 이때 중국 관내 잡다한 독립운동 세력을 임시정부로 결집시켰다.
1942년 좌익진영의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제되었고 좌익인사들이 제34회부터 의정원에 의원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중경에서 미군 군용기를 기다리던 중인 1945년 11월 12일 ‘한국애국가’ 악보가 출판되어 나왔다. 김구 주석의 붓글씨로 ‘한국 애국가’라는 제목이 세로로 쓰여 있고 오른쪽 하단에는 역시 친필 붓글씨로 ‘한·중·영 中·版’, 왼쪽 하단에는 김구 주석의 친필이 있다.
상해를 떠나 여러 도시를 전전하던 중인 1932년 남경서 열린 제30회 임시의정원 회의 개원식에서 “일동이 기립하야 애국가를 창하고”라는 오직 한 번의 기록이 남아 있다.
1944년 9월 광복군 장준하와 김준엽이 안익태 곡 애국가를 불렀다. 이후 또 다른 광복군 김문택도 1945년 1월 15일자 일기에 여러 동지들과 안익태 곡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고 돼 있다.
1945년 11월경 중경에서 ‘한국 애국가’ 악보를 출판할 때는 임시정부 내에서 어떠한 반론도 없이 순조롭게 김구 주석이 제학(題學)하고 날인한 다음 바로 인쇄로 넘어갔다.
1935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될 때까지 13년간 안익태 곡 애국가가 ‘국가’로 자리잡아 나가는 과정에 어떠한 단절성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안익태 곡 애국가는 통일될 때까지 존속되어야 한다는 정통성을 재확인한 것이다.
※위 글은 안양대학교 인문과학연구 학술지 26집, 증보 별쇄판 103~177쪽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