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대립 구도가 첨예해지고 있다. 이란이 미국과 전쟁을 불사한다면 북한은 ‘마지막 악의 축’으로 남게 된다.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협상 판도에도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악의 축이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02년 1월29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표적으로 지목한 이라크·이란·북한 3국을 의미한다.
미·이란 갈등은 미국이 지난 3일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을 피살한 사건을 계기로 점화했다. 이란은 즉각 이라크 내 미군 주둔지 2곳을 미사일로 보복 타격했다. 양국은 전쟁 직전까지 갔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에 경제제재를 가한다고 발표하며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라크 내 미국 대사관이 위치한 '그린존'에 다시 발사지 미상의 로켓 2발이 떨어졌다. 이란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 여객기 추락사고의 원인을 두고도 미국과 이란이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갈등의 불씨가 남은 상태다.
이 같은 긴장 상황은 과거 이라크전과 유사하게 흐르는 모습이다. 미 국방부는 ‘해외에 머무는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솔레이마니를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이끈 이란군이 중동의 테러 단체에 자금과 무기를 공급했다는 것이 미 국방부의 주장이다. 지난 2003년에도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제작하고 있다고 추측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미국인을 보호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전을 시작했다.
미국 동맹국들이 연루되는 양상도 이라크전과 비슷하다. 이라크전에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스페인 등이 참전했다. 한국 정부는 이라크전 당시 4개 부대를 파병했다. 지난해부터 영국, 일본 등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이 ‘호르무즈 호위 연합체’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미국으로부터 ‘호르무즈 해협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로 지목돼 연합체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다. 이들 국가에는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확전돼 자국 군대가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 여론이 형성됐다.
이란이 과거 이라크의 전철을 밟는다면 북한은 마지막 남은 ‘악의 축’이 된다. 교착상태에 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전망이다. 먼저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협상 몸값’을 올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는 자유아시아방송(RFA) 인터뷰에서 "북한은 미국이 아시아와 중동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적대 정책을 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며 ”미국과 이란의 충돌은 북한에 유리한 기회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이 비핵화 대가로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미국은 북한과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협상 테이블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도 선거 캠페인에 북한과 이란 모두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대응하는 모습을 통해 강경한 투사적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반면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는 지혜로운 협상가 면모도 부각했다. 이란과의 긴장 상황을 무사히 수습하고, 북한과 비핵화 협상에 착수한다면 기존 공화당 지지자뿐 아니라 중도 유권자의 표심도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란과 달리, 북한과 미국은 물리적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상대로 고비용의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업적을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주요 공적으로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불러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고립주의 외교를 구사하며 국비·국력 낭비를 최소화했다는 점도 부각했다.
미국은 이란과의 갈등이 북미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모습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장관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2020년 이란과 북한 문제 둘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여전히 희망적”이라며 북미 관계를 낙관하는 대답을 내놨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이 예고한 '성탄 선물' 없이 연말을 보냈다”는 점도 강조했다.
북미 사이에서 우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신중하게 기다리면서 북미 협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구갑우 북한대학원 교수는 10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린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본 한반도 정세 전망' 세미나에서 “우리 군이 미국의 군사작전에 가담할 시, 향후 북미 협상의 중재자와 한반도 평화 관련 다자협상의 주도자로서 나설 정당성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구 교수는 우리 정부가 호르무즈 호위 연합체 참여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한의 대북지원 정책이나 현 정부의 비핵화 중재자론에 공감하지 않는다”면서 “북한이 미국과 우리 정부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에 참여한다고 느낄 수 있도록 협상 무대를 꾸며야 한다”고 말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