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다음 이야기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보자. 국가대표팀에서 훈련 중인 체조선수 A가 팀 닥터에게 치료를 받던 중 성폭력을 당했다. A는 곧바로 자신의 코치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코치는 A의 부모와 팀 책임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체조 협회장은 A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협회에서 경찰에 신고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국가 보안 수사국에서도 사건을 인식하고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이 없었다. 각종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올림픽 출전이 확실히 되던 A는 올림픽 국가대표팀 선발에서 탈락한다. 후보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의 답은 하나가 아니다. 코치는 성폭력이 일어난 사실을 듣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야 한다. 코치에게 보고받은 팀 책임자도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야 한다. 이야기를 들은 체조 협회장도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야 한다. 성폭력을 저지른 일으킨 팀 닥터를 바로 해고했어야 한다. 선수 A 외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는지 철저히 조사했어야 한다. A에게 동등한 기회를 줬어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리우올림픽을 앞둔 2015~2016년 전미 체조 협회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지난해 6월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Athlete A)(감독 보니 코헨, 존 솅크)는 미국 언론에서 줄곧 ‘선수 A’(Athlete A)로 지칭된 체조선수 매기 니콜스(Maggie Nichols)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가 대표팀에 합류해 겪은 믿지 못할 이야기는 전미 체조 협회가 성폭력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제보를 받은 미국 언론사 인디 스타(The Indianapolis Star) 이야기로 이어진다. 국가대표팀 주치의 래리 내서의 성폭력 사실을 여러 제보자에게 확인한 인디 스타는 기사를 내고 충격에 빠진다. 같은 인물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생존자(Survivor)가 수십명, 아니 수백명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는 당사자에게 민감할 수 있는 성폭력 사건을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간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선악 구도로 만들지 않고, 가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사건의 자극적인 면을 최소화하고, 가해자 개인의 잘못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한다. 현재 사건을 소개한 후 사건과 멀리 떨어져 근본적인 원인을 파고드는 구성도 인상적이다. 대표팀을 구성하는 감독과 협회장이 누구고 그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오게 됐는지, 협회 내부는 어떻게 운영되고 선수들은 어떤 성장과정을 거쳐 어떤 생각으로 어떤 꿈을 꾸게 되는지 하나씩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심각한 현실을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주인공 자리엔 생존자(Survivor)라 불리는 수많은 여성 체조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때로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거침없이 들려준다.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이 겪은 고통을 억지로 다시 끄집어내는 끔찍한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갈 계획인지를 들려준다. 래리 내서는 20여년간 여성 체조선수 500여명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죄로 최장 175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재판 과정에서 156명의 여성들이 사건 생존자로 직접 법정에 서서 증언한다. 흔들림 없는 표정과 확신어린 그들 목소리는 꼭 눈과 귀에 담고 새겨야 할 명장면이다.
다큐멘터리의 한국 제목인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는 운동선수가 아닌 유일한 피해자인 카일 스티븐스가 법정에서 한 말이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수년간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래리 내서를 똑바로 바라보며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고 말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폭력을 당하며 말 못할 고통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에게 닿아야 할 문장이다.
알고리즘과 관계없이 모든 넷플릭스 구독자의 추천 목록에 올려야 할 다큐멘터리다. 다음에 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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