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조선 말기 ‘서양선박 청원’에 나선 것은 전라도에 교회 설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완주군과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천주교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31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초남이성지 2차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김수태 충남대 교수는 이날 ‘복자 윤지충·권상연·윤지헌의 삶과 신앙, 그리고 순교’ 주제발표에서 “신해박해(1791년)로 최초 순교자가 나온 전라도 신자들은 교회를 어디에 어떻게 만드느냐 문제를 논의했다”며 “전라도 지역 신앙공동체가 추진한 서양선박 청원은 서양인 선교사와 주교 영입과 함께 교회 건립을 통해 조선의 천주교회를 보다 완전한 교회로 만들기 위한 공통된 바람에서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양선박 청원은 1796년 당시 윤지헌을 비롯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서양인 신부의 영입과 서양인 주교의 영입을 바라며 북경 주교에게 서양선박을 청원했던 사안을 말한다.
김 교수는 “서양선박 청원을 통해 주교와 신부의 영입, 성상과 성유 등의 획득을 바랐던 조선의 신자들이 지향한 최종적인 목표는 조선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며 “이들은 서양선박이 조선에 들어와 조정과 접촉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고, 교회 설치와 함께 자유롭게 선교하고 믿게 되길 바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1795년 4월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후 전라도 고산 신앙공체를 방문했을 때 일화를 소개하며 “전라도가 조선의 천주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 교회 설립을 서양선박 청원의 목적으로 분명히 밝혔던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전라도 지역의 신앙의 초석을 놓은 세 복자와 유항검 등의 천주교 수용과정의 차이를 설명하며 “윤지충이 가장 먼저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됐고, 윤지충은 천주교의 수용이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박해사건인 1791년의 진산사건(신해박해)의 발단이 된 유교식 조상제사의 거부에 대해 “유교식 조상제사 거부는 진산의 윤지충과 전주의 유항검이 함께 읽고 공부한 천주교 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유교식 조상제사의 거부와 함께 보유론적 천주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이석원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에 관한 자료 연구’라는 주제로 관련 기록 자료를 종합해 정리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 연구실장은 “자료를 통해 수습과 안장이 확인된 경우는 물론 시신이 수습되지 못한 경우까지 포함해 순교자 273명을 확인했다”며 “이러한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학술세미나는 1부 ‘조선 후기 전라도 지역 순교의 역사적 의미’와 2부 ‘종교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 제고 방안’에 대해 주제발표와 국내 전문가 토론 순으로 이어졌다.
완주 초남이성지는 지난해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유해와 유물이 200여년 만에 발견돼 큰 관심을 끌었다.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복자의 유골과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 등 3인의 유해와 유물이 확인됐고, 유해는 초남이성지 교리당에 안치됐다.
완주=김영재 기자 jump022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