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속 장례식
콰지직! 천둥 번개 속에서 예식이 엄수된다. 베토벤의 장례식이다. ‘베토벤’은 시작과 끝에 이 장면을 넣었다. “‘베토벤’은 베토벤 사후 그의 서랍에서 발견된, 불멸의 연인을 향한 편지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이 점을 시사하기 위해 작품 처음과 마지막에 장례식을 배치했다”고 한다. 두 번째 장례식 장면에서 한 남자가 읽는 편지가 바로 그 편지로 풀이된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천둥과 번개다. 장례식 장면을 비롯해 베토벤과 안토니가 바덴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최후의 피아노 연주 장면 등에도 천둥소리와 번개 섬광이 공연장을 뒤흔든다. 베토벤이 사망한 1827년 3월26일엔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고 한다. 창작진은 이에 착안해 “고독하고 굴곡진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천둥소리를 활용했다.
허공에 뜬 피아노
베토벤은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기 이전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일까. ‘베토벤’은 베토벤의 영혼을 상징하는 장치로 피아노를 활용한다.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세간에 알려지는 1막 중반 장면이 대표적이다. “허공에 매달린 피아노는 사랑을 외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사이 어두운 표정으로 걷는 베토벤의 모습을 상징”한다. 누더기 천에 싸여 본래 모습이 가려진 채 공중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피아노가 마음 둘 곳 없던 베토벤의 처지와 맞닿는다. 창작진은 “화려한 거리와 그 거리를 걷는 베토벤을 극적으로 대비해 그의 깊은 고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했다”면서 “2막 후반 부서진 형태로 나타난 피아노는 불멸의 연인 안토니와 이별한 뒤, 유일한 사랑을 잃고 완전히 무너져내린 베토벤의 심리를 표현해 그가 느꼈던 깊은 절망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무너진 벽과 광활한 세계, 1막 엔딩의 비밀
‘베토벤’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1막 엔딩에선 무대 뒤 화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베토벤의 응집된 감정을 폭발시킨다. 1막 내내 무대를 옥죄던 구조물이 사라지며 광활한 세계가 나타난다.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베토벤에게 찾아온 가장 거대한 순간”을 표현한 연출이다. 오필영 무대디자이너는 EMK뮤지컬컴퍼니를 통해 “수십 년간 마음의 방을 굳게 닫았던 베토벤이 안토니를 만난 뒤 스스로 그 방을 열려고 시도한다”며 “이 순간 정서를 증폭하고 안토니의 존재감을 부각해 급격히 변화하는 베토벤에게 개연성을 부여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창작진은 이런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1막을 “어둡고 답답하게 갇힌 방의 형태”로 표현했다. 안토니는 묶여있던 악보집을 공중으로 흩뜨리며 베토벤을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한다.
불멸의 연인, 불멸의 편지
“내 전부 나의 천사.”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사랑은 잔인해’는 베토벤이 생전 불멸의 연인에게 쓴 편지에서 가사 일부를 따왔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천사, 나의 분신이여”로 시작하는 연서는 비애로 절절하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대도 이만큼 고통스럽지 않아도 됐을 것을.” 이는 노래에서 “끝없는 고통에도 우린 사랑을 갈망하네” “하나가 될 때까지” 등의 가사로 변형됐다. 1막에 등장하는 노래 ‘그저 나니까’도 실화에 토대를 뒀다. 1806년경 베토벤을 후원하던 칼 리니노프스키로 공작이 그에게 프랑스 장교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청하자, 베토벤은 격노하며 “귀족은 수천 명이지만 베토벤은 단 한 명”이라는 말을 남겼다. “귀족은 수천수만/ 베토벤은 나 하나”라는 가사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창작진은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를 본뜬 장례식 소품, 프라하 명소 카를교, 무대에 놓인 악보와 편지 필체를 활용한 디자인 등 곳곳에서 베토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신에서 뮤즈로…음악의 혼령
베토벤 곁에서 화려한 안무로 시선을 끄는 음악의 혼령은 멜로디·하모니·포르테·피아노·알레그로·안단테 등 음악의 여섯 요소를 시각화한 존재다. 문성우 안무감독은 지난달 프레스콜에서 “엄밀히 말해 혼령은 신(神)이다. 베토벤이 악성(樂聖)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혼령이 그의 뮤즈가 된다”고 귀띔했다. 이런 관계 역전은 “사랑과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의 말년”을 표현한 2막 후반부 ‘나의 운명2’에서 두드러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들이 (베토벤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때 혼령들은 베토벤이 귀가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온 예술을 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베토벤이 악성이 돼 음악의 우주로 떠나가며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는 과정을, 마지막까지 예를 갖춰 보내준다”는 것이다. 혼령들은 베토벤이 숨을 거둔 뒤에도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음악가가 죽어도 음악은 소멸하지 않듯 말이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