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으로 회귀"...주69시간, 중소기업 無노조 근로자만 '한숨'

"10년 전으로 회귀"...주69시간, 중소기업 無노조 근로자만 '한숨'

기사승인 2023-03-08 11:30:05
지난 1월 서울 마포구에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사진=박효상 기자

정부가 주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 개편에 나섰다. 규모가 작고 노동조합(노조)이 없을수록 장시간 노동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는 지난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를 개선, 바쁠 때는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노동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확정했다. 현행 주 52시간제(기본 40시간+최대 연장 12시간)에서 주 단위 연장 근로를 노사 합의를 거쳐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연장근로를 휴가로 적립한 뒤 안식월 개념으로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도록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 중견기업 등에서는 노동시간제도 개편안을 환영했다.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해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중소기업 등은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인건비가 늘어났다며 부담을 표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논평을 통해 “이번 개편안으로 연장근로 단위기간 선택지가 넓어지면서 업종 특성과 현장 상황에 맞는 근로시간 활용이 가능해져 납기준수와 구인난 등의 경영애로가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제도개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업무량 폭증에 대비할 수 있도록 미국과 같이 연장근로 한도를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벤처기업협회도 “그동안 경직적인 주52시간제의 틀 안에서 고질적인 인력난과 불규칙적 초과근로에 힘겹게 대응해 오던 애로가 유연성 확보를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조법 2·3조 개정 및 노동기본법 보장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노동계의 의견은 다르다. 특히 주 40시간 이상 노동이 보편화된 제조·게임·IT 노동자 등의 시름이 깊다. 제조업계에서는 24시간 공장 가동을 전제로 한다. 조를 나눈 교대 근무제가 보편화되어 있다. 주 52시간제가 폐지되면 인력은 줄고, 노동자 1명당 노동시간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게임·IT업계의 크런치모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크런치모드는 게임 출시 등 마감기한에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노조 지회장은 “10년 전 게임업계에 노조가 없던 당시에는 캐리어로 짐을 챙겨와 회사에서 살면서 게임을 만들었다. 쉬지도 못하고 친구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 당시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면서 “정부안은 현재 일부 업체에서 택하고 있는 ‘선택적 근무시간제’와 비슷하다. 현재 대다수 노동자는 휴가가 쌓여도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주 69시간제 시행시 일주일 시간표. 온라인 커뮤니티 

다만 노동계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 회사의 규모와 노조 유무 등에 따라서다. 대기업·중견기업이거나 사내 노조가 있는 경우 노동시간 개편의 부작용이 적거나 이를 막을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다. 대기업의 경우, 노동시간이 늘어나더라도 이를 계산해 노동의 대가를 지급한다. 장시간 일한 노동자가 길게 휴가를 쓰더라도 대체인력이 충분하다.

광주의 한 제조업체 노조 관계자는 “우려는 되지만 따로 대응하는 부분은 없다. 단체협약이 확고하고 노조가 조직력이 있기에 노동시간이 가중되지 않도록 방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김훈 대양판지 청주공장 지회장도 “과거 70~80시간 일했던 것과 비교하면 노동자 다수가 월급을 조금 적게 받아도 근로시간이 줄어든 것에 더 만족하고 있다”며 “근로자대표가 노조원이기에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하다. 회사도 노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 제조업체 노동자가 원단을 박음질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박효상 기자 

문제는 규모가 영세하거나 노조가 없는 경우다. 노동시간만 늘어날 뿐 이에 대한 대가는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1월 직장갑질 119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장·휴일·야간근로 등 초과근로에 대해 시간을 전부 인정해 가산임금을 주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에 전체 응답자의 32%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직장인 3명 중 1명은 야근을 하고도 야근수당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근로자대표가 요식행위로 세워져 제 역할을 못 하는 곳도 많다. 

정부의 노동시간 확대안에 대해 영세기업 노동자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직장인 이모(34·여)씨는 “주 52시간 시행 전에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8시에 퇴근했다. 퇴근 후 초주검이 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서 “52시간 시행 후 좀 살만해졌는데 노동시간을 다시 늘린다니 화가 난다. 포괄임금제이기에 일을 더 한다고 수당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경기도의 한 업체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모(33)씨도 “지금도 대체인력이 없어 연차를 쓰기가 어렵다”면서 “서너달 쉬지 못하고 일하더라도 한 달 쉰다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고 했다.

전문가는 정부의 노동개혁 방향을 비판적으로 진단했다. 박성우 노동과인권 노무사는 “정부 발표안의 핵심은 장시간 노동의 길을 여는 것”이라면서 “현재 여야 구도상 정부안의 통과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오는 2024년 총선 등으로 구도가 바뀌게 된다면 1호 법안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당장은 통과가 어렵더라도 남은 재임기간 강경한 메시지를 내놓을 수도 있다”고 봤다.

고용노동부는 영세·무노조 사업장 등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했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노사 합의가 필요하도록 근로자대표제도를 정비했다”면서 “근로자의 건강 보호를 위한 3중 장치도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11시간 연속 휴식을 부여하거나 1주 64시간 상한을 준수하는 내용 등이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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