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첫 기차여행입니다. 치열한 경쟁 탓에 예매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어요.”
환갑 친구 두 명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영희(60·여·가명)씨는 오랜만에 떠난 여행에 한껏 들떠있었다.
이들은 청량리역에서 정선아리랑열차(A-Train)에 몸을 실었다. 이들이 작심한 여행 계획은 ‘당일치기 자전거 여행’이다. 집에서 가져온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정선의 명소들을 둘러보는 ‘무박 여행’을 기대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메산골이라 멀게만 느껴지는 강원 정선군은 아리랑열차에 탑승하면 당일 여행이 가능하다. 오전 8시30분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오후 6시26분 정선역에서 돌아오는 노선으로 당일로 정선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열차의 내부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서로 편하게 마주 보며 담소를 나눌 수 있고, 종착역까지 창밖 천혜의 풍경을 보며 갈 수 있는 창가 전용 좌석도 있어 기차여행의 낭만이 물씬 풍겼다.
열차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정선 5일장이 열리는 2, 7, 12, 17, 22, 27일 청량리에서 아우라지역까지 왕복 1회 운행되고 있다.
쿠키뉴스 기자는 이틀에 걸쳐 아리랑열차 연계형 1코스와 2코스를 체험했다. 두 코스 모두 시티투어버스를 통해 이동할 수 있다.
1코스(정선역~구절리역 레일바이크~아우라지~나전역크림커피)
◆맛도 대박, 여행도 대박정오에 맞춰 정선역에 도착했다. 장날이라 그런지 수많은 인파가 정선역에 쏟아졌다. 이들을 마중 나온 시티투어 버스 두 대(1,2코스)는 눈 깜짝할 사이 만석이 됐다.
금강산도 식후경. 버스는 5일장이 열리는 정선아리랑시장으로 이동했다. 시장에는 향토 음식 맛집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곤드레밥과 감자옹심이, 모듬전으로 유명한 맛집 ‘대박집’으로 곧장 향했다.
향긋한 곤드레밥에 강된장을 넣어 삭삭 비벼 한 입 먹으니, 무더운 날 지쳐 집 나갔던 입맛이 돌아온 것 같았다. 곤드레 향긋함이 입안에서 오랫동안 감돌았다. 곤드레는 전체적으로 녹갈색을 띠고 구수한 냄새가 날수록 극상품이라고 한다. 과거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먹는 ‘그 때 그 시절’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다.
감자옹심이는 담백하면서도 쫀득쫀득하고 씹는 맛인 일품이다. 감자옹심이는 통감자를 강판에 곱게 갈아 전분이 가라앉으면 물기를 쭉 짜낸 뒤 남은 덩어리와 전분을 섞어 빚어 만든다. 감자전분은 알맞게 물기를 빼야 아린 맛이 없어지고 빛깔이 고와진다.
대박집의 모듬전은 4종으로 구성돼 있다. 담백한 메밀부침, 메밀과 김치소의 절묘한 맛이 기가막힌 메밀전병, 달지 않으면서도 고소한 수수부꾸미, 녹두전이 꽤 푸짐하게 담겨 나온다.
이곳에서 만든 전은 원재료를 그대로 사용하되 밀가루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먹기에도 안전하다. 직접 전자멧돌을 통해 메밀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장님의 모습에서 음식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이 돋보였다.
13년 동안 이곳 대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신승연 대표(여·60)는 “재료는 제일 좋은 것으로 쓰고, 절대 재사용 안 한다”면서 “늘 손님들의 반응을 보고 열심히 연구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소탈한 미소를 보였다.
◆청량한 자연과 하나 되다…레일바이크
오후 1시45분 정선공설운동장. 배도 잔뜩 불렀겠다. 시티투어버스는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는 구절리역으로 향했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7.2km의 철길. 과거 석탄산업의 쇠퇴로 주민 수가 급감하면서 기차 소리가 끊긴 이곳에 천혜의 자연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레일바이크는 2인용과 4인용이 있어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즐기기 좋다. 대부분 내리막길이라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1km 구간은 약간 오르막 경사로이므로 더 힘차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
레일 아래로 흐르는 청옥 빛깔의 송천계곡 옆으로 솟아오른 기암절벽과 정겨운 농촌 풍경이 장관이다. 터널 구간에 들어갈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무더위를 날려준다. 자연 속 청량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다 보면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아우라지,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
신나게 페달을 밟다 보니 어느덧 종착지인 아우라지역에 도착했다. 아우라지는 사랑하는 남녀가 불어난 강물에 며칠을 만나지 못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이 애절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 ‘여송정(餘松亭)’ 옆에는 처녀의 동상이, 반대편 마을엔 총각의 동상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서 있었다.
마을을 연결하는 달을 품은 다리도 이들의 한 맺힌 절절한 사연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구슬픈 아리랑이 바위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아우라지는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한 송천과 삼척의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두 물줄기가 어우러진다 해서 아우라지라고 한다. 여름 장마 때 풍수적으로 양수인 송천 쪽 물이 많으면 대홍수가 나고 음수인 골지천 쪽 물이 많으면 장마가 그친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무엇보다 강원도 무형문화재인 정선아리랑의 노랫가락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때 그 시절 힐링 스팟…나전역 크림커피 한잔 어때?
레일바이크를 꽤 신나게 달린 탓일까. 갈증이 최고조다.
독특하면서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심신이 힐링할 수 있는 최적의 코스가 있다고 하길래 이번엔 나전역으로 향했다.
나전역은 정선역과 아우라지역 사이에 있는 간이역이다. 과거 석탄산업이 번성하던 시절에는 많은 이들이 애용하는 중요 노선이었지만, 지금은 카페로 변신해 고즈넉한 자연과 함께 여유를 즐기는 힐링 스팟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전역 카페에 들어서니 기차를 기다리던 교복 차림의 소년, 소녀 모형이 1960~197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드라마 ‘모래시계’, ‘킬미힐미’, 예능프로그램 ‘1박2일’ 및 서태지가 출연한 CF 촬영장소도 보존돼 있다.
이곳 시그니쳐 메뉴인 나전역크림커피가 눈에 띄었다. 커피의 상단부터 곤드레크림, 에스프레소, 우유 순으로 각각의 고유 색깔이 층을 이뤄 독특했다.
커피에도 지역특산물을 녹여낸 아이디어가 톡톡 튄다.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겼는지 맛도 두 배, 감동도 두 배다.
2코스(정선역~정선아리랑센터 아리랑뮤지컬~화암동굴)
◆아리아라리, 신명 나는 흥의 한판으로~
여행 이튿날. 이번엔 ‘아름답고 신명 나는 흥의 한판’으로 향했다.
눈 앞에 펼쳐진 공연은 바로 정선아리랑 뮤지컬 ‘아리 아라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정선아리랑과 연극·음악·노래·무용·영상·타악·연희 등 다양한 장르가 함께 어우러져 현대적 트렌드에 맞게 새롭게 창작한 공연이다.
노래(소리) 중심이었던 기존 정선아리랑 공연과는 달리 전문예술단 20여 명이 관람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다이나믹한 공연을 연출했다.
공연은 정선 최고의 나무꾼이자 목수인 신기목과 아내 이정선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시대 경복궁 중수로 기목은 돈을 벌기 위해 뗏목을 몰고 한양으로 떠났지만, 유흥과 노름으로 번 돈을 모두 잃고 15년 동안 기억을 잃은 채 살다가 딸을 만나 고향으로 함께 돌아오는 여정과 삶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공연단을 향한 박수 세례와 환호성이 멈추질 않았다. 감동과 재미, 희열, 환희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아리아라리’를 또다시 볼 날을 고대하며 무대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피서지와 체험 현장이 한곳에…화암동굴, 한여름에도 ‘덜덜덜’
한여름 무더위를 날리기 위해 마지막 코스인 화암동굴로 향했다.
화암동굴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연간 순금 2만2904g을 생산하는 천포광산이 있던 곳으로, 국내 5위의 금광이었다.
지금은 여름철 피서지이자, 동굴체험의 교육 현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금과 대자연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단장한 국내 유일의 테마형 동굴이다.
내부는 동화의 나라, 꿈꾸는 정원-미디어아트, 금의 세계 등 총 3가지 테마로 구성됐다.
동화의 나라에선 화암동굴 캐릭터인 금깨비와 은깨비를 통해 금광개발 과정과 금의 가치 등을 동화적으로 연출했다.
꿈꾸는 정원에선 황홀한 미디어아트가 펼쳐진다. 형형색색의 꽃들과 동굴을 유영하는 대형 고래가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금의 세계에선 금광석의 생산에서 금제품의 생산 및 쓰임까지 전 과정을 전시해 놓았다.
이 밖에도 각종 석회석 생성물과 종유석 생성물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작은 동방들이 있고, 동굴호(湖)가 있다.
정선군은 금광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천연동굴과 인공갱도를 관광지로 개발해 1993년부터 일반인에 개방했다. 화암동굴의 총 길이는 약 1803m로, 도보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화암동굴은 1980년 강원도기념물 제33호로, 2019년 천연기념물 제557호로 지정됐다.
이렇게 이틀에 걸친 아리랑열차-시티투어버스의 여정이 끝났다.
산속 오지 시골이라고만 생각했던 정선. 이곳은 역사, 사랑, 이야기가 담긴 매력적인 관광지였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여행의 여운을 느끼며 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려 본다.
정선=박하림 기자 hrp11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