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현아’ ‘대한항공’이 ‘대세’입니다. 시청률 끝내주는 인기 드라마도 아닌데 2명 이상 모인 자리에서 조현아와 대한항공을 모르면(과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대화가 안 될 정도니까요.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대한항공 내 ‘로열 패밀리’의 ‘제왕적 문화’에 대한 논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켜보고 있자니 과거 일화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게 누구였는지까지는 기억 못하지만 학교 밖의 더 높은 어딘가(아마 교육청이었겠죠)에서 누가 온다 그러던 때가 가끔씩 있었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엄연히 수업시간임에도 “자, 이번 시간은 대청소를 할 거예요”라며 다정한 말투와 함께 아이들에게 걸레, 빗자루, 대걸레 등을 쥐어줬습니다. 반 아이 중에 키가 큰 축에 속했던 전 대부분 걸레를 쥐었습니다. 높은 곳의 창문을 닦아야 했으니까요. 초등학생이 수업권 박탈이니 뭐니 아는 게 있었겠습니까. 그냥 높은 아저씨 오신다니까 선생님께서 하라 그러면 했던 거죠.
군생활을 전투경찰로 한 전 경찰서 상황실·지령실에서 근무했습니다. 두 부서 모두 3교대(오전 9시~오후 7시, 오후 7시~익일 오전 1시, 오전 1시~9시) 근무 체제였습니다. 전날 2~3시간 밖에 자지 못한 오전 1시~9시 인원은 근무 후 내무반에 복귀해 점심시간까지 취침이었습니다. 부대원들은 이들이 얼마나 고단한지 잘 알기 때문에 선임, 후임 할 것 없이 오전엔 내무반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문도 살살 열고 닫는 등 배려해주는 문화가 자리 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선임병이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 부서의 부장(경사)이 아침에 내무반 문을 덜컹 열고 들어오더니 조금 있으면 ‘서장님’이 전투경찰 내무반을 보러 오신다며 다들 빨리 대청소를 하라는 겁니다. 그러더니 밤샘 근무를 한 후 자고 있는 대원들의 이불을 우악스럽게 걷어내며 “너희들도 빨리 일어나!”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20대 초반이었던 전 초등학교 시절과 달리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는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그게 ‘낮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 권리 침해로 연결돼선 안 된다는 걸.
전 그 부장에게 “쟤넨 밤새도록 근무하고 방금 전에 와서 자는 거다. 2명밖에 안 되니까 쟤넨 의경 내무반에 양해 구해서 거기서 계속 자도록 하고 대청소는 나머지 대원들끼리 해도 충분하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장 왈, “야 임마, 서장님이라고 서장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장님!”
제겐 이런 것들이 모두 지금보다 덜 세련됐던 과거의 일인데 현재진행형인 곳이 있습니다. ‘우리의 날개’라고 자평하는 대한항공입니다.
지난 12일 ‘땅콩 리턴’의 장본인 조 전 부사장이 서울 공항동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 도착하기 전 대한항공 관계자가 건물 경비원에게 2층 공용화장실 청소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미 깨끗한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이 이용 중이었는데도 “조 전 부사장이 쓸지 모르니 다시 한번 확인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네요, 이미 할 일 다 한 청소 아주머니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불려나와 다시 일을 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관계자는 불미스런 일로 조사를 받으러 온 조 전 부사장의 처지, 자신에게 높은 사람이 다른 직장 사람에게도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지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나 봅니다.
짜증났던 일도 지나고 나면 피식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되곤 하죠. 바쁜 일상 속에 잊어버리고 살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대한항공, 그리고 조현아 전 부사장, 정말 고맙습니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