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민석 기자]
“학교생활을 즐거워하던 딸이 지정취소 이야기가 나온 후로 한번은 눈물을 펑펑 쏟더군요. 부모입장에서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죠. 입시학원에선 ‘서울외곽고등학교’라고 놀림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러니 아이들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겠습니까. 학교는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정치적인 갈등에 휩쓸려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으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중학교에서 전교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첫째 아들을 일반고에 보냈다가 주변 친구들에 휩쓸려 재수하는 모습을 보곤, 올해 둘째 딸을 서울외고에 보냈다는 한 아버지의 말이다. 그는 “딸을 고등학교에 진학시킨 지 한 달 만에 이런 사태가 나니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외국어 교육을 특수목적으로 하는 서울외고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 측과 함께 서울시교육청이 실시한 청문을 세 번 모두 거부했다. 학부모들은 “지정취소가 확정될 경우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학교 측 역시 “학부모의 의견과 학교에 입장이 같진 않다”면서도 학부모들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불참을 선언했다.
“교육청 청문 보이콧 이유요? 한두 개가 아닙니다.”
최근 큰 변수가 생겼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상대 후보에 대해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 공직선거법 250조 2항 허위사실공표 등의 위반 혐의로 지난 23일 1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조 교육감은 항소장을 제출하고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도 할 계획이지만 당선 무효로 막을 내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이렇다보니 시 교육청은 청문 절차가 끝나는 대로 20일 이내에 교육부장관에 지정 취소 동의 여부를 요청해야하지만 여의치 않아 보인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일단은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6월 제20대 서울시교육감에 당선된 조 교육감은 일반고 위기 극복방안으로 기준에 미달하는 자사고·특목고·특성화중을 일반 중·고교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얼마 후인 지난해 10월 시 교육청은 자사고 6곳에 대해 지정취소하고 일반고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당시에도 학부모들의 반발은 매우 컸다. 당시 교육부는 학부모와 자사고 측에 서서 시 교육청의 지정취소처분을 직권 취소했다. 시 교육청은 교육부의 결정에 대해 대법원에 기관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자사고 폐지 공약 강행… 교육청·교육부 첨예 대립
시 교육청은 올해 두 번째 ‘개혁 대상’인 특목고와 국제중학교에 대해서도 평가를 실시했다. 그 결과 특목고에서는 서울외고가, 특성화중에서는 영훈국제중이 지정취소 기준(60점)보다 낮은 점수를 받아 일반학교로 전환될 처지에 놓였다.
평가는 학교에서 자체평가를 실시해 제출한 운영성과보고서를 토대로 서면평가 및 현장평가 방식으로 진행됐다. 학교운영, 교육과정 및 입학전형, 재정 및 시설, 시교육청 자율지표 등 4개영역 27개 안팎의 평가지표를 반영했다. 시교육청에선 교육청 중점 추진과제 추진, 학교 설립목적에 부합하는 교육활동 운영, 감사지적 사항 및 이행정도 등을 자율지표로 삼았다.
시교육청은 지정취소 대상이 된 두 학교에 대한 청문을 4월 중에 실시하려고 했다.
영훈국제중 측은 지난 14일 실시된 청문절차에 이사장과 학교관계자들이 출석해 평가 결과에 대해 소명했지만, 서울외고 측은 14일 예정된 1차 청문에 이어 17일 2차 청문과 29일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던 3차 청문에도 불참했다.
김강배 서울외고 교장은 29일 통화에서 “시교육청은 지난 2일 학교에 통보 없이 언론에 (지정취소와 관련해) 발표했다”며 “절차상 사전에 학교에 확인을 받고 평가 점수를 밝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평가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학교와 학부모들은 청문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또 “최대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 교육청의 평가를 신뢰할 수 없으니 청문도 의미가 없다는 입장으로정리된다.
1차 청문에 앞서 서울외고 학부모비상대책위원회는 시 교육청의 청문을 거부하는 이유를 담은 결의문을 학교 측에 전달했다. 여기엔 비상총회 참석 학부모 362명(부부 포함 500여명) 중 320명(89%)이 청문회 거부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돼 있다.
결의문 내용을 요악하면 “서울외고를 포함한 이번 평가를 받은 다른 5개 외고의 평가결과를 공개할 것”과 “청문회에 학부모 대표가 참관할 수 없는 이유와 외국어 고등학교의 설립 목적에 가장 부합한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를 밝힐 것” 등이다. 또한 정치적 의도가 깔린 의혹이 든다면 가처분소송은 물론 민형사상소송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비대위는 “지난해 교육부가 공개한 2010~2014년 외고·과학고·영재학교 졸업생들의 대학진학률을 비교한 결과 서울외고 졸업생의 어문·인문·사회계열 진학률이 95.9%로 서울 지역 6개 외고 중 가장 높았다”면서 “어문계열 진학률도 서울 6개 외고 중 3번째인데 점수가 낮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비대위는 지난 6일부터 1차 청문회가 열리던 14일까지 서울시교육청 청사 앞에서 지정취소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교육청을 항의 방문을 하기도 했다.
2학년에 재학 중인 자녀를 둔 조대연 비대위원장은 30일 인터뷰에서 “외고 설립 취지를 보면 어문학계열 강화이고 서울외고가 평가지표상 가장 점수가 높은데 조 교육감은 29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또 ‘서울외고가 설립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며 “이런 자가당착이 어디 있느냐. 평가가 떳떳하게 이뤄졌다면 왜 공개를 못하느냐”고 따졌다.
조 위원장은 “교육부에 가서 모두 소명하겠지만 자체적으로 평가를 해도 시 교육청 평가는 오류가 너무 많다”면서 “7명의 평가위원들이 7가지 항목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모두 2.3으로 똑같다. 어떻게 다 같을 수가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청문회 불참에 대해선 “시 교육청이 자신 있으면 지정취소하면 될 것을 애걸복걸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그쪽에서 아쉬워서 계속 청문에 나오라고 한 것을 마치 선의를 베푼 것처럼 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극성 학부모 아니야… 아이들 지키기 위한 것”
조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이라며 “종합평가란을 봤더니 ‘입학 후 학력저하가 된 학생들’ ‘수준미달 학교’ 이런 표현을 써 놨다. 교육자들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극성 학부모라서가 아니고 저런 발언들을 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앞장선 것이다. 평가위원장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사과를 받을 것이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조 위원장은 지난 17일 감사원에 이번 건과 관련해 공익 감사청구를 청구했다.
3학년 자녀를 둔 조연관씨는 “청문회는 시 교육청에서 명분을 쌓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참의사를 밝힌 것”이라고 입을 열었다.
조씨는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강북 학생들이 주로 진학하는 학교인데 갑작스럽게 지정 취소가 되면 전학을 가는 등 지역을 떠나야하는데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교육은 ‘백년대계’여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조씨는 “조 교육감은 국민참여재판을 본인이 하자고 해놓고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조 교육감은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수용할 줄 알아야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씨는 특히 “서울외고에 대한 지정취소는 정치적 목적이 깔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 교육감이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본보기와 희생양으로 서울외고를 지목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부족하더라도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지 취소시키고 포기시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않느냐. 조 교육감은 방향만 제시하고 후임이 들어와서 이어가면 될 것이며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면 여유를 가져야지 단기적 목표 달성에 왜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조씨는 “어떤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벼랑 끝에서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걱정이 된다”며 “국민들의 뜻에는 역행하는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답했다.
또 다른 학부모 안모씨는 “입시를 앞둔 3학년 아이가 충격을 받았다. 묵묵히 공부하던 아이들이 왜 마음고생을 해야 하느냐”며 “청문에 응하면 ‘서울외고 망신주기’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안씨는 “이번 평가는 객관성과 투명성이 결여된 채 진행됐다”며 “다른 5개 학교는 평과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서울외고만 지정취소 한다면서 먼저 언론을 통해 공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 짜 맞추기식 졸속 평가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서울외고 재학생의 거주지를 조사한 결과 노원·도봉·성북·강북구 지역 학생이 74.7%(619명)에 이른다”며 “평균 기준점수에 2~3점 미달됐다고 지정 취소하는 것은 힘없고 ‘빽(배경)’이 없는 학교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시 교육청은 학부모들의 이 같은 반발에 일체 대응하지 않고 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가능한 한 학교 측이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지금까지 세 차례 기회를 줬는데 앞으로 또 기회를 주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평가 자료공개 요구에 대해선 “교육부에서 지난해 발표한 대로 평가했기 때문에 추가로 공개할 자료가 없다”면서 “청문 절차 공개의 경우 학교 측에서 운영상 기밀 등이 있을 수 있다. 또 시 교육청 규정상 청문회 공개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서울외고에 대해 교육부에 지정 취소를 요청하거나 2년 유예 후 재평가 결정을 내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교육청은 ‘드라이브’ 교육부는 ‘브레이크’
그러나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규칙에 따라 교육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정취소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나오고 있다. 학교 측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학부모들과 청문 불참을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교육부는 지난해 교육청의 자사고 지정취소 시도로 인한 교육청과의 갈등 이후 올해부터는 교육부 장관의 동의를 얻어야 지정취소 가능하다는 내용을 반영한 ‘초중등교육법 시행규칙’을 제정하고 ‘특목·자사고와 특성화중의 지정취소에 관한 규정’을 대폭 수정했다.
현재 외고·국제고·국제중은 초중등교육법시행령에 따라 5년마다 운영성과를 평가받고, 평가기준에 못 미칠 경우 교육감은 교육부장관과의 동의를 거쳐 지정취소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지난 19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지정취소 논란과 관련해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해 많은 기회를 주고 가급적 보완해주는 게 옳다”고 말해 주목받았다. 그는 또 “교육부로 넘어오면 다시 한 번 검토하겠다”고 했다. 사실상 시 교육청의 방침에 반대의 뜻을 밝힌 셈이다.
이 때문에 시 교육청은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외고 학부모들이 평가 결과가 공정하지 않다며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데다 황 장관의 발언도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 교육감은 벌금 500만원이라는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아 ‘식물교육감’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쓴 상태다. 앞으로 조 교육감이 평가 결과를 그대로 반영해 지정 취소를 결정하고 교육부에 동의를 요청할 것인지 주목된다. 조 교육감이 지정 취소 쪽으로 결정을 내리면 최종 결정은 교육부의 몫이 된다.
결국에는 조 교육감이 다음달 중순 서울외고와 영훈국제중에 대해 교육부에 지정 취소를 요청해야 하는 기한을 자연스럽게 넘기면서 유야무야로 끝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교육감이 누구고 정치적 성향이 어떠냐에 따라 교육정책이 갈팡질팡 행보를 펼치고 시 교육청과 교육부가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애꿎은 학생들만 상처를 받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ideae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