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혼술남녀’ 신입 PD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

[친절한 쿡기자] ‘혼술남녀’ 신입 PD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

‘혼술남녀’ 신입 PD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

기사승인 2017-04-19 13:44:08


[쿠키뉴스=이준범 기자] tvN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조연출로 일하던 故 이한빛 PD의 사망 소식이 처음 전해진 건 지난해 11월이었습니다. 한 매체가 이 PD가 ‘혼술남녀’가 종영된 바로 다음날인 지난해 10월 26일 새벽에 강남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로 발견됐다고 보도한 것이죠.

유가족은 이 PD가 일하던 CJ E&M에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과도한 업무와 인격 모독, 권위적인 조직문화가 이 PD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장에서 CJ E&M 관련자들의 문상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강경한 태도였습니다. 조만간 유가족과 사측이 협의를 통해 사건이 마무리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이 PD의 사망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협의되거나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진정한 사과를 원하는 유가족에게 CJ E&M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결국 유가족을 중심으로 청년유니온,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등 17개 시민사회단체로 꾸려진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사건의 자세한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며 재조명 받게 됐습니다.

이 PD의 동생인 이한솔씨는 지난 17일 자신의 SNS에 ‘즐거움의 ‘끝’이 없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대기업 CJ, 그들이 사원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에서 이 씨는 자신의 형이 “현장에서 과도한 모욕과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며 “형이 남긴 녹음파일, 카톡 대화 내용에는 수시로 가해지는 욕과 비난이 가득했다”고 폭로했습니다.

또 “형의 생사가 확인되기 직전, 회사 선임은 부모님을 찾아와 이한빛 PD의 근무가 얼마나 불성실했는지를 무려 한 시간에 걸쳐 주장했다”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 PD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회사 직원에게 사과했고, 몇 시간 뒤 고인의 죽음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지난 18일에는 이한빛 PD 사망사건 대책위원회가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대책위원회는 “CJ E&M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라”며 “또한 사망사건과 관련된 책임자의 징계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PD 같은 일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대책위원회는 이 PD가 살인적인 업무와 언어폭력에 시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촬영 기간이었던 55일 동안 이틀밖에 쉬지 못했고, 중간에 해고된 계약직의 계약금 일부를 받아내는 업무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 PD가 남긴 녹음파일과 메신저 대화 내용에는 선임 피디 등 촬영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욕과 비난이 가득했습니다.

이날 공개된 이한빛 PD의 유서에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다”며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책위원회에 세 차례 보낸 서면 답변서에 따르면 CJ E&M 측은 “타 프로그램 대비 근무강도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었다”, “팀 내 갈등이 있었지만 고인의 성격과 근무태만이 문제였다”고 거듭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건에 주목도가 높아지자 CJ E&M 측은 지난 18일 오후 보도 자료를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CJ E&M 측은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이한빛님에 대해 큰 슬픔을 표합니다”라며 “그동안 유가족과 원인 규명의 절차와 방식에 대해 협의를 해왔지만 오늘 같은 상황이 생겨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당사 및 임직원들은 경찰과 공적인 관련 기관 등이 조사에 나선다면 적극 임할 것이며, 조사결과를 수용하고 지적된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등 책임질 것입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CJ E&M 측이 이 PD가 사망한 지 6개월이 지나는 동안 같은 입장을 되풀이했는지, 또 유가족과 협의에 도달할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왜 유가족들과 시민 단체가 직접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네티즌의 비난이 쏟아진 이후에야, 경찰 조사에 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건 드라마 제작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고 누군가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 PD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이상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하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밝혀져야겠죠.

CJ E&M의 진정어린 사과와 명확한 개선방안이 나오는 날에야 이 PD의 사망 사건은 마무리 될 수 있을 겁니다. 첫 공식 입장이 나오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습니다. 이 PD는 언제쯤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요.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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