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대중문화는 우리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산업 하나만 떼놓고 봐도 1년 극장 관람객 입장권 매출액은 1조 5000억원(2013년 기준)에 달하죠. 현재 한국에 사업자로 정식 등록돼있는 영화 제작사는 약 2000여개. 그만큼 규모가 큰 산업이며, 종사자도 엄청납니다. 배우들은 영화 한 회에 억 단위 개런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그 멋진 광경 뒤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신조어 중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로지 열정을 위해서라면 적은 돈도 개의치 않는 젊은 창작자들을 이용해, 반대로 ‘열정’을 핑계로 정당한 임금 지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중문화산업계에서 ‘열정페이’ 사례를 찾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예술인복지법 개선을 위해 나섰지만 현업 종사자들은 “제대로 대우 받으려면 멀었다”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급시키려 만든 제도와 ‘열정페이’뿐인 실무 간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산업 현장? 종사자들의 인식? 교육 환경? ‘열정페이 같은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할만한 콘텐츠를 만들면서 정작 즐겁지 않은 대중문화 종사자들을 인터뷰하고 문제점을 알아봅니다. 현업 종사자들이 원할 경우 인터뷰는 비실명 처리됩니다.
▲ 화려하게 만개한 K팝, 대중음악산업 노동 환경도 달라졌을까
1990년 중반 싹을 틔운 K팝은 20년간 큰 폭으로 성장해 현재 중요한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7년 콘텐츠 산업전망’에서 2017년 음악산업 매출액을 지난해보다 5.2% 증가한 5조3000억 원 규모로 내다봤다. 수출액은 5.5% 증가한 4억 달러로 기대했다. 2007년 음악산업 매출액이 약 2조3600억 원이었던 것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K팝의 비약적인 성장은 매출액뿐 만 아니라 다양한 지표로 체감할 수 있다. 국내 가수가 해외에서 대규모 투어 공연을 개최하거나 유명 음악차트의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국내 관광객 중 일부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완성도 높은 ‘K팝’ ‘한류’ 콘텐츠는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넘어서 역동적인 국가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 대통령이 가요시상식에 영상 축전을 보내는 등 국가는 적극적으로 K팝의 위상을 자랑해 왔다.
K팝이 화려하게 전 세계로 뻗어 나간 만큼 관련 산업 종사자의 노동 환경도 개선됐을까. 이에 관한 관계자들의 대답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1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해도 여전히 열악하다는 것. 시장은 성장했지만, 노동에 대한 인식과 환경은 여전히 제자리라는 평이다.
지난해 열린 한 가요시상식의 스태프 모집 공고는 노동을 대하는 음악산업계 전반의 태도를 보여준다. 시상식 주최 측은 현장 운영 스태프를 모집하며 근무 시간과 임금을 공지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3무(無) 요건을 내걸었다. ‘교통·일급여 지원하지 않습니다’ ‘자원봉사활동 증명서 발급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업무에 따라 공연 관람이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현대판 노예를 찾는다는 비난이 일자 시상식을 후원하던 서울시는 후원명칭 사용 승인을 철회하는 등 일련의 제재를 가했다. 그제야 주최 측은 스태프 모집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사례가 널린 가요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악습은 근로계약서 미작성이다. 중소 기획사의 홍보 담당자 A씨는 쿠키뉴스에 “회사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큰 규모의 기획사는 아니지만 유명 연예인이 소속된 회사라 놀라움은 컸다. 몇 번이나 “정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더불어 A씨는 “다른 회사도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대형 가요 기획사의 홍보 담당자 B씨도 마찬가지. B씨는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전반적으로 고용계약서에 작성 대한 인식이 부족한 편”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임금과 근무 조건 등을 모두 구두로 통보받고 조율했다고 전했다.
일하는 것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 또한 문제다. 중소 기획사 로드 매니저의 경우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월급으로 100만 원 가량을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근무 시간은 하루 24시간. 유동적이고 모호한 아티스트의 일정에 따라 대기를 거듭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 시간에 따른 임금을 계산해보면 최저임금을 운운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적은 임금조차 제때 지급되지 않아 생계 자체를 곤란하게 하는 일도 벌어진다. 가요 기획사 TS엔터테인먼트는 지난 3월 직원의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 문제를 보도한 파이낸셜뉴스에 따르면 TS엔터테인먼트는 정직원에게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 하지 않았고 수개월 동안 제대로 임금을 주지 않았다. 당시 직원들은 “생계가 어려워 대출까지 받았다”고 토로했다. TS엔터테인먼트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가수가 속해 있는 중견 기획사다.
이와 같은 사례는 모두 10년 전의 일이 아니다. 2017년 현재의 현실이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환경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빠르게 떠나고 버티는 사람만 남는다. 로드매니저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 지금은 제작자로 일하고 있는 C씨는 오래 버틴 사람 중 하나다.
▲ 여전히 월 100만 원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대중문화산업의 성장과 화려한 면이 부각되며 대학에 연예경영과 매니지먼트 관련 학과가 느는 추세다. 그만큼 대중문화 산업을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는 청년층이 늘고 있는 것이다. 매니지먼트 학과에 특강을 나가기도 한다는 C씨는 재학생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이상적인 세상과 현실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다. C씨는 국가적으로 K팝을 자랑하지만 그에 비해 업계 종사자에 대한 지원과 대우가 형편없다고 주장했다.
“몇 년 동안 가요계에서 직접 일해 보니 아쉽고 고쳐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요. 이런 현실을 직접 겪고 나니 매니지먼트학과 특강에 나가 학생들을 볼 때 참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좋은 매니저, 제작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졸업 후 일선에 나서겠지만 현실은 암담한 거죠. 몇 년 사이 K팝이 크게 발전했지만 실질적인 근무 환경은 변한 게 없어요.”
무엇이 문제일까. C씨는 아직도 월 100만 원을 받지 못하는 매니저가 존재한다고 증언한다. 업무 강도와 시간에 비해 턱없는 금액이지만, 고용자 측은 아쉬울 것이 없다.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악습을 감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매니지먼트 업계는 철저히 도제식이다. 신임 매니저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배운다는 측면이 강하다. 더불어 인맥과 입소문이 중요한 업계 특성상 문제를 제기하기도 힘들다.
“아직도 월 100만 원조차 받지 못 하는 신입 매니저가 많아요. 세금을 떼면 약 80만 원 정도를 손에 넣는 거죠. 지방에서 올라와 일하는 매니저 중 월세를 내고 치과 치료를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가 없어서 고생하는 경우도 봤어요. 매년 최저 임금이 오르고 있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죠. 일이 힘들고 박봉인 만큼 교체가 빠르니까요. 가요계 특성상 바닥이 좁다 보니 서로가 다 알고 있어요. 버티지 못하고 나가봤자 다른 회사에 못 간다는 걸 알아서 문제가 있어도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쉬쉬하는 편이에요.”
C씨가 매니저로 일할 때 가장 난감했던 것은 적은 임금뿐 아니라 24시간 이어지는 업무였다.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그대로 운전대를 잡아 위험한 경우도 있었다. 근무 시간뿐 아니라 업무 영역에도 경계는 없었다. 아티스트 이동과 관리 외에도 자잘한 심부름이 더해졌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본래 업무와 부수적인 업무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업무상 운전을 하다가 차에 손상이 가면 수리비용을 회사와 절반씩 나눠 보상해야 했다. C씨는 “이 조차 해주지 않고 운전한 매니저에게 100% 보상을 요구하는 회사도 있다”고 귀띔했다. 법인카드를 지급받지 못해 업무 관련 비용을 자신의 돈으로 먼저 지불하고 회사에 청구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당장 가진 돈이 없는 사회 초년생에겐 생계 곤란을 유발하는 부당한 시스템이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회의감을 느낀 C씨는 결국 매니저를 그만뒀다.
업계를 떠나리라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C씨는 결국 다시 가요계로 돌아왔다. 좋은 음악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꿈을 접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요계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버티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제작사를 운영 중인 C씨는 “대중음악산업과 K팝이 발전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만큼, 많은 이들이 업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정부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을 시행한 만큼 관련 부서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세부정책에 반영해줬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노동에 대한 인식 및 수익구조 개선, 제도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10년 후에도 가요계 노동 환경은 지금과 달라지지 않으리란 지적이다.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