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 갈암 이현일이 세운 정자 ‘계정’ 수백 년 만에 발견

영양군, 갈암 이현일이 세운 정자 ‘계정’ 수백 년 만에 발견

기사승인 2019-11-14 09:26:25

경북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하천 변에서 최근 조선 중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巨頭)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건립한 정자인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이 발견됐다. 군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수백 년간 잊어야만 했던 중요한 유적지를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발견해 세상 밖으로 알렸다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14일 영양군에 따르면 계정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벗들과 소요하며 ‘요산유수(樂山樂水)’의 삶을 실현했던 장소로 알려졌다.

조선 중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맥을 이어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巨頭)가 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영산서원(英山書院)의 원장을 역임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은 20대 중반에 들어선 1653년 부모가 낙토(樂土)를 찾아서 깊은 산속으로 은거(隱居)를 선택하자,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 ‘수산유허비(首山遺墟碑)’ 부근에 ‘갈암(葛庵)’이라는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谿亭記)’에 의하면 어느 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오는 신원천(新院川) 가를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 그곳에 ‘계정(谿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

기문과 문집에 의하면 갈암을 비롯해 석계 일가는 ‘계정’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닦으며 여가를 즐겼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선비들의 이상적인 삶이었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의 아들들이 모두 당대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는가 하면 갈암의 경우 조정에 출사해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1672년 석계 일가가 수비를 떠난 뒤에도 그들의 유거지와 정자는 당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방문하고 싶은 지역의 명소였다.

하지만 1694년 폐비 민 씨의 복위운동으로 시작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 또한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고 1909년에서야 관직과 시호를 모두 회복했다.

이영재 학예연구사는 "복원사업 용역을 추진하고 있는 안동대학교 산학협력단의 단장인 배영동 교수로부터 ‘현지인이 바위에 ‘석ㅇ(石ㅇ)’ 또는 ‘석계(石溪)’라는 석각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인과 확인해 본 결과 그 석각은 갈암 선생의 정자가 있었던 ‘계정’이었다"라고 발견 당시의 정황을 전했다.

영양=권기웅 기자 zebo15@kukinews.com

권기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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