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쿠키뉴스] 강연만 기자 = 일제강점기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창구역할을 했던 부산 백산상회에서 자금을 총괄한 남평(南平) 윤주석(尹柱石·1889∼1954·남해군 설천면) 전 하동고등학교 교장의 독립운동 행적이 선생의 유품에서 확인됐다.
경남 하동군(군수 윤상기)과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선생의 막내딸 윤덕연(81·부산시 해운대구) 전 부산 토성초등학교 교장이 제공한 선생의 유품과 김일영(83) 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가 연구 분석한 '남평 윤주석 선생 유고집'(고려대 부산교우회 2009년) 자료에서 선생의 항일운동 행적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자료에 의하면 윤주석 선생은 1915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를 졸업 후 지난 1916년 백산상회 서기로 들어가 백산 안희제와 호형호제하며 1920년 8월까지 동지적 결합으로 무보수로 일하며 자금과 조직 관리를 총괄하며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전달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백산상회 안희제로부터 나왔다고 밝힌바 있다.
▲ 임시정부 '연통제' 구축…1919년 '기미육영회' 설립과 해외 유학생 파견 기여
또한 선생은 안희제의 뜻에 따라 1920년대 경남은행 하동지점에서 7년간 근무하며 어음 할인을 통한 독립자금 송금을 맡았다.
그리고 하동에서 '섬강한시회(蟾江漢詩會)'를 주관, 안희제(의령 출신·건국훈장), 방정환(아동문학가·건국포장), 이승훈(전 동아일보 사장·건국훈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근 진주·사천·남해ㅍ광양·구례지역 유력인사들과 교류하며 시국을 논하고 독립자금 모집과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聯通制) 구축도 힘썼다.
연통제는 국내·외 업무 연락을 위한 지하 비밀 행정조직으로 국내에서는 도·군·면 단위로 조직했다.
선생은 이와 함께 1919년 11월 부산에서 안희제 주도로 결성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 설립의 실무를 도맡아 추진했다.
기미육영회는 가난한 청년 인재에게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장학회로 안호상(초대 문교부 장관)·이극로(일제강점기 한글학자)를 독일에 신성모(제2대 국방부 장관·건국훈장)를 영국에 유학 보내는데 윤주석이 일경의 감시를 따돌리고 배편을 마련하는 등 행동요원 역할을 했다.
선생의 유품 중에는 하동 한시회에 참석했던 백산 안희제가 지은 시 1편과 소파 방정환이 지은 시 1편 남강 이승훈(기미독립선언서 서명 33인중 1인)의 시 3편을 비롯해 한시 64편(광복 전 44편, 광복 후 20편)과 선생이 지은 노래 타령 16편이 있다.
이와 함께 자필이력서, 경남은행 하동지점에 근무할 때 안희제·이우식(시대일보 사장·건국훈장) 등과 찍은 사진(1921년)과 안희제의 친필편지(답서, 1920년) 등이 있다.
정재상 소장은 유품 확인에서 "하동출신 독립운동가 김승탁(적량면·건국포장·2019)과 김응탁(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12인 중 1인)의 장형(長兄)인 김경탁(金景鐸) 선생의 한시 4편도 이번에 처음 확인했다"며 "김경탁 3형제의 독립운동이 윤주석이 주관한 '섬강한시회' 활동을 통해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범호(양보면·대통령표창·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12인 중 1인)의 시 2편과 하동 신간회(독립운동 단체) 간사로 활약한 이원기(李源基) 선생의 시 4편, 하동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경(악양면)의 시 1편 등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 '곱사춤' 추며 우리말 노래와 타령 지어 부르고 영·호남에 전파 '민족문화 운동'
유품을 분석한 김일영 교수와 정 소장은 광복 전에 지은 선생의 한시 섬강춘작(蟾江春酌)에는 "劍筑相看摠快顔(검축상간총쾌안) 亂世行藏無所寄(난세행장무소기) 칼춤에 축을 치고 서로 보며 유쾌한 얼굴, 난세의 처신을 붙일 곳이 없는지라"~ 내용과 송남평귀고산 한시 중에 "藏身賣業皆虛事(장신매업개허사) 판매 사업에 몸을 감춘 게 모두 허사"라고 했다.
또 노래 무현금(無絃琴)에서는 "무현금 무현금아 그래도 싸우고 이기는 게 보람일세"라는 구절과 광복 후 지은 타령(각설이 노래)에는 "만세 만세 만만세, 삼일정신 잊지 말고 자주갱생 어서하소"라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곧 일제의 잔혹한 민족 탄압과 백산상회와 경남은행에서의 독립자금 송금 등이 발각됨에 따라 많은 어려움과 절망, 나라 잃은 슬픔을 한편의 시로 남겼으며, 광복 후에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말고 우리민족 스스로 일어서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윤주석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1937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암송 강요, 1940년 창씨개명 등 민족 말살정책이 지속적으로 펼쳐지자 우리말 노래와 타령인 '입석가(立石歌), 무현금 상여가, 돈노래, 달노래, 봄노래, 개타령' 등을 지어 영호남지역 장터를 돌며 가장 서민적인 춤 '곱사춤'을 추고 우리 가락인 판소리와 시조창을 부르며 민족문화를 지키고 보급하는데 온몸을 던졌다.
▲ 백범 김구·엄항섭 등과 활동…하동고 건립과 인재 양성에 헌신하다 1954년 '순직'
윤주석은 해방을 맞이하자 엄항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겸 선전부장·건국훈장)과 함께 백범 김구를 수행하며 하동 순회강연에 참석,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지했다.
이후 1947년 교육입국의 길로 나선 선생은 하동중학교 설립 기성회 사무국장, 하동향교 장의(掌議), 1949년 고향주민들의 부름을 받고 남해군 설천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53년 하동지역민과 유지들의 영입을 받아들여 하동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부족한 교실난을 해소하기 위해 통영어업조합(수협)의 목조건물을 헐어 이송 신축, 인재양성을 하던 중 1954년 3월 6일 과로로 병을 얻어 순직했다. 향년 65세였다.
하동군민과 유지들은 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삶의 모든 것을 조국 광복과 교육에 바친 그의 마지막 길에 슬퍼하지 않은 군민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묘소는 그의 고향마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노량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다.
자료를 제공한 막내딸 윤덕연 교장은 "아버지께서는 업적에 있어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셨다"며 "공(功)을 멀리한 삶에 오히려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3·1운동 100년과 임시정부수립 100년의 세월이 흘렀고 부친의 의로운 행적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하동군이 추진하는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에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상기 군수는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위해 일신을 바친 윤주석 선생의 숭고한 뜻이 계승 될 수 있도록 하동군민과 노력하겠다"며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과 함께 정부서훈을 시급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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