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쿠키뉴스] 오명규 기자 =공주시(시장 김정섭)는 12월의 역사인물로 충절을 보여준 이명성·이명덕 형제를 선정했다.
25일 시에 따르면, 형 이명성은 고려 왕조, 동생 이명덕은 조선 왕조에 충절을 보여준 형제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이달의 역사인물로 선정해 업적을 기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형 이명성(李明誠, 생몰년 미상)의 호는 송은(松隱)으로 동생 이명덕과 함께 목은 이색의 제자이며 포은 정몽주와 긴밀한 사이였다.
고려 왕조에서 감무, 감찰어사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伊川)의 산중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이후 조선 태종은 여러 차례 그를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이명성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사후 성종대에는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동생 이명덕(李明德, 1373~1444)의 호는 사봉(沙峰)으로 공주이씨의 공주 입향조이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시대 공주지역 각종 읍지류에 가장 먼저 기록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형과 함께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92년(태조 원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병조참판 등 중요 관직을 역임했다.
1444년(세종 26) 7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사후 우의정 증직과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490년(성종 21)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명성·이명덕 형제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기군 금남면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창건과 동시에 ‘명탄(鳴灘)’으로 사액을 받았다.
명탄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31년(영조 7) 현재의 위치인 공주시 월송동에 옮겨 복원되었지만,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955년 재건되었다.
현재, 명탄서원에서는 ‘명탄서원 공주를 추로지향으로 꿈꾸다’, ‘숨어있는 역사 명탄서원(충절사) 다시보기’등 유교문화와 선비의 삶을 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김정섭 시장은 “정치적 격동기였던 고려말, 조선초에 서로 다른 의미의 충절을 보여준 이명성·이명덕 형제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2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했다”며, “‘충절을 지킨 형제와 명탄서원 활용방안’ 학술세미나를 다음 달 12일 명탄서원에서 개최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mkyu102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