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차 개발자 A씨는 2013년 과중한 업무강도로 급작스럽게 건강 악화를 겪었다. 당시 그는 게임 출시 일주일을 남기고 주중 연속 야근에 주말 출근을 병행했다. 5일 내내 자정을 넘겨 퇴근하면서 하루 평균 업무시간은 15~16시간, 거기에 주말 근무를 포함하면 대략 100시간 가량 일했다. 강행군 이후 일주일의 휴가를 썼지만, 후유증을 혹독히 겪었다. 휴가기간을 포함한 열흘은 거의 탈진한 채로 지냈고, 중간에는 현기증으로 응급실을 찾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노동정책 기조에도 변화가 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과거 게임업계를 병들게 했던 ‘크런치모드’도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크런치모드는 신작 출시를 앞두고 직원들이 오랜 기간 고강도 업무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잦은 야근이 업계 관행으로 여겨지면서 판교나 구로 등 게임사가 몰려있는 지역은 밤늦게까지 환하게 불이 켜진 경우도 많았다. 이 때문에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 배’ 등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었다. 52시간 제도 도입 등으로 2018년부터는 업계 전반의 업무 환경이 그나마 개선된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중견게임사 관계자는 “이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눈치를 보면서 야근을 하는 경우도 줄었다”며 “시간이 생겨 운동도 시작했는데 확실히 전보다 건강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 52시간제 개선을 강조한 윤 후보가 당선되면서, 업계는 바짝 긴장한 모양새다. 윤 당선인은 그간 노동 유연화를 강조했다. 현재는 특정 기간(1~3개월) 동안 평균적으로 주당 52시간(연장시간 포함)을 일하면 합법으로 보는데 이 특정 기간을 1년 이내로 늘리자는 것이다.
윤 당선인은 유세 당시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청년 세대들의 스타트업 애로사항을 들어보기 위해 회의에 간 적이 있는데 이 분들이 주 52시간제도 시행에 예외 조항을 둬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했다”며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윤 당선인은 최근 노동 유연화 공약에 힘을 싣고 있다. 2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6단체장과 회동해 “기업을 자유롭게 운영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제거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라며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IT‧게임 업계 종사자는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이다. 차상준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 지회장은 “과거 월요일에 짐을 싸서 출근해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일하며 생활하기도 했다”며 “주 52시간제 유연화로 인해 노조가 없는 기업일수록 과거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현재도 일부 기업에서는 주 52시간제가 사실상 지켜지지 않는다. 52시간 초과근무를 하더라도 휴식이 약속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0년 스마일게이트에선 노조 설문조사 응답자의 12.6%가 주 52시간을 넘겨 일한 것으로 나타났고, 카카오는 지난해 6월 노동부의 수시 근로감독에서 한 달 동안 최대 118시간의 연장근로를 한 직원이 확인되기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1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크런치모드를 경험했다’고 밝힌 종사자 비율은 15.4%에 불과했다. 다만 게임사 규모에 따른 비율은 사뭇 다르다. 300인 이상 되는 대형 개발사의 경우 크런치모드를 경험한 비율이 0.5%에 불과했지만 5~49인, 50~99인 규모의 중소 개발사 구성원은 각각 84.4%, 88.5%가 크런치모드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크런치모드를 경험한 구성원 중, 이후 휴식을 전혀 보장받지 못했거나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고 답한 이는 21.1%에 달했다. 매우 보장됐다고 말한 이는 27.6%였다.
업계는 근로 시간보다는 포괄임금제 등 제도 개선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한 관계자는 “포괄 근무제가 적용되면서 사실상 추가근무 이후에도 추가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52시간이 넘으면 그냥 기록 없이 일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52시간제 도입으로 근로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생긴 것은 사실”이라며 “만약 윤 후보의 발언처럼 업무 환경이 바뀐다면, 또 다시 비극이 나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52시간 제도의 존재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미흡한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40여명 규모의 게임사에 재직 중인 한 업계 관계자는 “게임 개발을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대형 게임사의 경우 개발자들이 로테이션을 돌 수도 있지만, 소규모 회사에서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개발자들의 몸값이 뛰면서 인력 충원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회사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다소 일괄적으로 주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된 것은 아쉽다”며 “30인 미만의 사업장을 대상으로는 연장근로가 허용되는 유예 기간이 적용되지만, 30~40인 정도의 업체는 다소 애매한 선에 걸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문대찬, 강한결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