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칼럼-이유원]
영국의 인디게임 개발사 네리얼에서 개발하고,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명작 인디게임들을 퍼블리싱하기로 유명한 디볼버 디지털에서 공급한 ‘레인즈’ 시리즈는 현대 인디게임사의 성경 같은 존재 중 하나다.
오직 두 개의 선택지만으로 자원을 관리한다는 파격적인 게임 방식과 추상화된 스토리텔링, 카드를 섞고 넘기는 듯한 연출 등은 ‘아이작’ 시리즈, ‘페이퍼스 플리즈’처럼 수많은 인디게임 개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국내의 게임 공모전이나 게임잼, 각종 학과 및 아카데미 행사에서 레인즈와 유사하거나 발전된 형태의 게임 아이디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레인즈를 플레이해보게 된 계기가 무척 기억에 남는다. 동아리방에서 선배가 이상한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게임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카드를 넘기는 장면만 보고도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 길로 일부러 더 게임에 대해 찾아보지도 않고 바로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레인즈는 중세의 왕이 되어 윤회를 거듭하며 때로는 독립되고 때로는 연결된, 카드로 표현된 수많은 다양한 상황들을 오른쪽 또는 왼쪽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으로 해결하여 네 종류의 자원을 관리하는 게임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한 종류의 자원이 넘치거나 바닥나게 되면 즉시 게임이 끝나버린다. 물론 다음 왕이 재위를 이어받았다는 설정으로 계속 게임을 진행할 수 있으며, 특정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가 이후에 나타나는 카드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숨겨진 분기도 무척 많아 오랫동안 마니아 층의 탄탄한 사랑을 받아온 게임이다.
이 인기에 힘입어 레인즈는 같은 게임 방식을 유지하되 테마를 달리하는 후속작들을 꾸준히 출시해왔다. 그러나 본작을 이기는 후속작은 없다고 하던가. ‘Reigns : Her Majesty’는 스팀에서 본작의 아성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판매량을 기록했고, ‘Reigns : Game of Thrones’은 초강력 IP(지식재산)의 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 비해 낮은 판매량과 유저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네리얼은 레인즈 시리즈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고, ‘카드 샤크’를 성공적으로 출시한 뒤에 즉각 다시 새로운 후속작 준비에 나섰다. 그것이 바로 넷플릭스 게이밍에 합류한 ‘레인즈 삼국’이었다.
여느 때처럼 뭔가 시청은 하지 않으면서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던 나는 반가운 아이콘을 발견했다. 레인즈 시리즈도 좋아하고 삼국지도 좋아하던 나에게 이 발견은 엄청난 기쁨이었다. 바로 설치하고 클리어까지 쉬지 않고 플레이했는데, 좋은 점도 있었고 아쉬운 점도 있었다.
우선 최대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삼국지란 테마의 압도적인 강력함이다. 확장성과 포스트모던성까지 갖춘 최고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소재 아닐까? 제한된 대사와 애니메이션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레인즈 특유의 연출 방식과도 무척 잘 어울린다. 인물 이름, 지명, 사건, 생김새 등 아주 제한적인 정보만으로도 유저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고, 빠르게 알아듣게 한다. 또한 창의적으로 개변되는 스토리라인에 대한 재미도 배가시켜준다. 조조에게서 황제를 빼앗아오는 등 역사를 바꾸고 등장 인물들의 반응을 보거나,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절실해질 때 재밌었다.
두번째 장점은 레인즈 시리즈가 전통적으로 강조해왔던, 이야기 자체로서의 동기 부여 측면이다. 레인즈는 대대로 숨겨진 분기와 업적 등을 주된 재미 요소로 강조해왔다. 게임 내내 크고 작은 도전 과제를 제시하고,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름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이벤트를 가득 건넨다. 이는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오직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유저는 계속 노력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나 역시 서커스 원숭이의 아들을 찾아주기 위해 익주의 험난한 산악 지대를 넘는 등 이상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는데, 무척 재미있고 뿌듯했다.
다만 아쉬웠던 점도 조금 있다. 네리얼 입장에선 큰마음 먹고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신규 콘텐츠, ‘전투’가 그것이다. 스토리에서 인물을 얻으면 덱에 추가되는데, 이 덱은 ‘서울 2033’의 아이템처럼 세력한 보유한 인물의 일람이기도 하면서 실제 전투 페이즈에 사용할 유닛이기도 하다. 이 점부터 스토리상 수집하고 싶은 인물과 덱에 전투용으로 쓸 인물 9칸이 공유되고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예를 들어 주창을 초반에 덱에 넣어 쓰다가 더 좋은 유닛으로 교체하기 위해 덱에서 뺐는데, 주창이 순식간에 세력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나중에 또 나를 모르는 척하며 재등장하는 것이 조금 속상했다. 나름 정이 들었는데….
전투는 턴제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하스스톤’의 용병단 모드와 비슷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진형을 형상화한 유닛들의 사각형을 직접 스와이프하며 돌리면서 전투한다는 점은 참신했지만, 그 참신함이 반영된 전략 요소는 비교적 적었다.
또한 전투로 전환할 때, 레인즈를 스토리텔링 또는 자원 관리 장르로 여기던 유저 입장에선 게임 장르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어 몰입이 깨지고 전투 과정이 번거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자동 전투 기능이 제공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자동 전투 승률에 영향을 미치는지 게임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이는 수동 전투를 수행하는 유저에게도, 자동 전투만 수행하는 유저에게도 의아함만 남겨서 유저 경험 측면에서 조금 아쉬움을 남겼던 것 같다.
상대 AI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쉬웠다. 깊이 있는 덱 빌딩을 경험하기보단, ‘킬각’인데 본진을 비우는 AI의 실수 등을 노려 클리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AI 수준이 낮음에도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고 진형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는 불필요한 모션을 넣었는데 처음에만 신기했고 계속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또한 아무래도 테마가 테마인지라, 기존 레인즈 시리즈의 핵심 시스템이 오히려 몰입을 깨는 경우도 있었다. 아슬아슬한 자원 관리가 본작의 매력이었지만, 이번 테마에서 통치와 정치에 관한 질문을 많이 주다보니 유저의 의도와 다른 정답이 정해진 선택지를 눌러야하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가 될 수 있겠다고 느껴졌다.
삼국지란 테마와 레인즈 시리즈의 상호 작용성을 좋아하는 유저 입장에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 세계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거나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를 스스로 몰입해 보고 싶어할 텐데, 자원 관리라는 더 상위의 목표와 상충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곤 한다. 나는 빨리 병사를 모아 조조를 치고 싶은데, 지금 군사 자원이 너무 높아서 어쩔 수 없이 해산을 시켜야 한다거나 하는 상황들이 가끔씩 플레이어의 몰입에 제동을 건다.
서울 2033을 오랫동안 라이브 서비스하면서 유저들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게임에 대한 접근에 대해 유심히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알게 된 재밌는 것 하나는 자신이 정한 컨셉, 또는 유저 개인의 신념과 취향에 벗어나는 선택지에 대한 선택률은 현저히 낮았다는 점이다.
천방지축 무법자로 살려고 마음을 먹고 캐릭터를 육성해온 유저는 어떤 사건에서도 그것이 게임 내에서 이득이 되든 되지 않든 불우한 이들을 돕는 착한 선택을 내리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실제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에 있으면 어떻게 행동 했을 지를 고민하며 플레이한 유저는 자신의 신념과 취향에 반하는 선택지를 누르지 않으려 했다. 즉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있어서는 게임 내에서 유도하는 규칙이나 이득과 유저가 게임을 대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메인 스토리 역시 다소 아쉬웠다. 사실 요즈음의 인디게임들에게서 이제 ‘제4의 벽을 넘는 반전’ 요소는 이미 신파라 할 수 있다. ‘포니 아일랜드’, ‘두근두근 문예부’ 등에서 너무나도 참신하게 표현되어 왔으며, ‘인스크립션’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레인즈 삼국은 여전히 비슷한 줄거리를 사용한다. 시간 여행으로 메인 게임을 진행하고, 그 안에서 바깥 현실의 단서를 조금씩 찾고, 마지막엔 게임 바깥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로 끝낸다. 게임의 규칙 자체를 스토리 요소로 편입하려는 무척 세련되고 참신한 스토리 진행이지만, 이는 사실 본작 레인즈에서도 플레이어의 게임 오버와 재도전에 대해 악마와 윤회라는 설정을 넣어 사용한 바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인디게임들에서 사용해온 덕에, 유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엔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네리얼은 본래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진, 내가 생각하는 진짜 ‘인디 정신’으로 무장한 게임사다. 벌써 레인즈 시리즈의 4번째 작품인 것으로 보아, 그들의 레인즈에 대한 애정은 아직 어마어마한 것 같다. 그렇다면 네리얼이 레인즈를 사랑하고, 사람들이 레인즈 시리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거듭한다면 앞으로 레인즈 시리즈가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와 인디게임계에 큰 파장과 엄청난 재미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yuwon@banjihaga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