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퇴 요구로 충돌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갈등 봉합 수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여권에서는 갈등 기폭제가 된 김경율 비대위원의 거취가 불씨로 남아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새하얀 폭설이 내린 23일,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대형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특화시장을 방문했다. 이날 한 위원장은 녹색 민방위복 차림으로 현장에 먼저 도착해 15분가량 시장 어귀에서 윤 대통령을 기다렸다.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도착하자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윤 대통령도 악수한 뒤 어깨를 ‘툭’ 치며 화해의 제스처를 주고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소방당국으로부터 화재 경위 등을 보고 받고 전소된 현장을 점검했다.
서울에서 각자 내려왔던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전용열차를 함께 타고 상경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 여당 관계자들에게 “상경할 사람들은 함께 (열차를) 타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자리 있습니까”라고 물은 한 위원장은 “같이 가자”는 윤 대통령 답변에 열차에 동승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오는 약 2시간 동안 열차의 같은 칸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양측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과, 김경율 비대위원 사천논란 등으로 정면 충돌했다. 최근 한 위원장은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경율 비상대책위원의 마포을 출마를 공개 지지하며 논란에 휩싸였다. 김 위원은 한 위원장에 의해 영입된 인사로, 당 안팎에서는 시스템이 아닌 ‘사천(私薦)’이라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윤 대통령 역시 자신이 원칙으로 삼은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 원칙’을 한 위원장이 어겼다는 실망감에 강한 우려를 표한 것으로 나타냈다.
갈등설이 불거진 지 이틀 만에 ‘화해 무드’가 형성됐지만, 뇌관은 여전하다. 김경율 비대위원의 거취 문제가 대표적이다. 김 비대위원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공개 거론하면서, 김 여사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한 위원장도 이와 관련해 “국민들이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이라고 했다.
당 안팎에서는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김 비대위원이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위원장이 김 비대위원의 서울 마포을 도전에 힘을 실으며 사천 논란이 불거진 만큼, 비대위원직 사퇴나 불출마 선언 등 어떤 방식으로든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한 위원장과 윤 대통령 간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기 위해선, 논란 당사자들이 책임 있는 태도를 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절충안으로 김 비대위원 사퇴를 언급했다. 한 국민의힘 의원 역시 “당정 간 추가 갈등 없이 진짜 사태가 끝나려면 김 비대위원이 사퇴하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내비쳤다. 김 비대위원이 총선에서 서울 마포을 출마 의사를 밝힌 만큼 후보 등록 이후 사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주장이다.
한 위원장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공천 문제나 김 여사 의혹 등 이견이 큰 정치 현안에 말을 아끼며, 민생 행보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 언급을 피하며 중도층 민심을 공략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 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 출근길에서 김 비대위원 사퇴설에 “그런 얘기를 들은 바 없다”며 선을 그었다. 김건희 여사 리스크와 관련해 입장 변화가 없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제 생각을 이미 충분히 말씀드렸다”고 일축했다. 김 여사의 사과나 입장 표명이 필요하냐고 재차 묻자 “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말을 아꼈다. 이어 “우리 정치의 핵심은 결국 민생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해 온 것도 민생을 좋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목표”라며 “대통령께서도 마찬가지”고 했다.
다만 김 비대위원이 사퇴할 경우, ‘한동훈 리더십’에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부담 요소다. 과거 윤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김 비대위원이 어떤 식으로든 물러나게 되면 한 위원장은 오랜 직장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바른말 하고 본인이 위촉한 비대위원을 버리게 되는 거고, 그렇게 되면 한 위원장은 주변의 사람들이 따르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명분 있는 사퇴가 관건이라는 시선도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김 비대위원은 민주당 586운동권의 ‘맞수’ 같은 느낌이지 않았나. 한 위원장 입장에서 김 비대위원을 내보낸다는 것은 본인이 추진하려는 정치 개혁에 대한 포기 선언과 다름없다”라며 “명분이 중요하다. 설득력 없이 사퇴하면 한 위원장의 리더십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