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볼 의사 없는데 필수약도 품절…“의약품 생산관리 절실”

아이 볼 의사 없는데 필수약도 품절…“의약품 생산관리 절실”

아동병원 44곳 전수조사 결과 141개 의약품 품절
진해거담제·기관지확장제 52개 품목 수급개선 시급
“‘의료 선진국’ 말뿐…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정부, ‘수급 불안정 민관협의체’ 가동하며 해결방안 검토

기사승인 2023-06-24 06:05:02
대한아동병원협회는 20일 대한병원협회 13층 소회의실에서 소아청소년과 필수의약품 품절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사진= 박선혜 기자

8살 남아를 둔 엄마 김이설(34세) 씨는 이달 초 아이의 기침이 멈추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그간 기침이 심할 때마다 기관지확장제인 ‘풀미칸’을 처방받아 왔는데, 이번에는 의사가 약이 없다며 대신 ‘벤토린’을 처방했다. 김 씨는 “아이가 약을 먹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3일째 잠을 못 잤다”며 “맘카페를 통해 약이 있다는 약국 8곳에 전화를 돌려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올해 들어 품절 상태가 계속된다. 지인이 아이와 자주 찾는 약국에는 6개월 만에 풀미칸 30개가 겨우 들어왔다고 한다”고 말했다.

성조숙증이 있는 초등학생 여아를 기르는 박준희(가명·36세) 씨는 지난 2020년 아이의 첫 검사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한다. 성조숙증 여부를 확실히 알기 위해 뇌하수체기능 저하 검사 시약인 ‘렐레팍트’를 예약했는데, 갑자기 병원에서 약이 떨어졌다는 알림 문자가 왔다. 문자에는 ‘제약사 한독약품의 완제품 선적에서 문제가 발생해 내년 이후 공급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박 씨는 “검사 한 번 받으려고 몇 달째 기다린 상황이었는데 당황스러웠다”며 “해당 시약은 현재도 수입중단 상태라 구하기가 어렵다. 어떤 엄마는 렐레팍트가 들어올 때까지 검사를 미루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최근 소아, 청소년이 복용하는 의약품 품절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일반의약품, 처방의약품 심지어는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필수의약품까지 수급이 부족해지면서 환아 가족들과 의료 현장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대한아동병원협회가 6월 기준 44개 아동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품절의약품 수는 모두 141개로 확인됐다. 그 중 진해거담제와 기관지확장제는 52개 품목이 품절돼 수급 개선이 가장 시급한 약으로 꼽혔다. 뒤를 이어 해열제 19개 품목, 천식약 13개 품목, 콧물약 10개 품목 등이 다수 품절된 제품으로 나타났다. 

중증 질환 필수의약품도 현재 9개 품목에서 수급이 불안정하다. 뇌하수체 성선자극검사 시약 ‘렐레팍트’, 성조숙증 치료제 ‘데카펩틸 3.75mg’, ‘항경련제 데파코트 스프링클제형’ 등이 이에 속한다. 중증 질환 필수의약품은 복용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어 국가적으로 수급 관리가 중요한 약물이다.

소아청소년 필수의약품 품절 현황(6월 기준).   대한아동병원협회

심각한 상황이 끝을 모르고 지속되자 협회는 지난 2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필수의약품 품절에 따른 현장의 고충을 토로했다. 이 날 간담회에 참가한 의료진과 약사들은 “‘약이 없어요’란 말을 요즘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고 또 하게 된다. 처방을 내는 의사도, 조제해야 하는 약사도, 품절된 약을 구하러 약국을 수소문하는 환아 부모들도 모두 난감한 처지”라고 입을 모았다. 

이홍준 협회 정책이사는 “제대로 된 감기약 없이 다가올 가을,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처럼 어이없는 이유로 고통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품절 때마다 처방 코드를 바꾸고 의약품 도매상에 연락해 하소연하고, 또 길어지는 조제시간 때문에 생기는 보호자들의 불평 등은 이제 일상이 돼 버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나마 상급종합병원은 상황이 그나마 낫지만, 아동전문병원들은 약을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다. 제조사나 공급사에 문의하면 수입이 되지 않는다거나 생산 계획이 없다는 해명 뿐”이라며 “기관지확장제 하나를 구하기 위해 부모들끼리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약이 있는 약국과 병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처방되는 곳을 찾아 ‘뺑뺑이’ 도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최용재 협회 부회장은 “호르몬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터너증후군 환아의 경우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2차 성징이 발현될 수 있는데 약이 부족해 제 때 투여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치료해 줄 필수의료 의사도 부족한데, 약마저 없으면 환아들은 어떻게 살아가나”라며 “동남아 같은 의료 후진국에서도 이런 품절 사례를 겪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의료 선진국이라면서 해결을 다그치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최 부회장은 “일각에서는 무리한 약가 인하로 제약사가 약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적자가 되면서 수급 부족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제 값에 수입도 못하게 하고 제 값에 생산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해외에서 약을 사오든, 정부 지원으로 제약사 생산 여력을 높이든 반드시 해결돼야 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약국가 사정도 다를 바 없다. 아동병원 인근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박소현 약국장은 “최근 품절약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생제, 해열제, 변비약 등 어린이 환자에게 자주 처방되는 약물들의 조제가 어려운 현실”이라며 “매일매일 제약사와 도매상 담당자에게 품절약에 대해 문의하며 사정하고 있다. 환자들에게도 ‘약이 없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 답답하다”고 전했다.

박 약국장은 “물론 원료약 수급이 어렵고 약가 문제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아이들을 위해 처방할 약조차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의약품 생산 관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의약품 수급 부족 실태를 점검하며 발 빠른 대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앞서 지난 14일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보건복지부는 의약품 수급 불안정 민관협의체 간담회를 통해 현장 의견을 듣고,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안영진 식약처 의약품정책과 과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의료계에서 제기한 품절 의약품 141건은 민간협의체를 통해 해결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제품들이다. 품절 사유가 제각각인 만큼 단계적으로 수급 문제를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약사회, 병원협회와 내용을 공유하고 복지부와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안 과장은 “다만 이번에 아동병원협회에서 문제를 제기한 중증질환 필수의약품 품절 제품들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빠른 시일 내에 조사를 마치고 대응하도록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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