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 진행되는 내내 반복적인 상황을 만들고 지엽적인 대처로 시청자들의 화를 돋우다가 극의 마지막 회에 가서야 전처의 환영을 보고 회개한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다.
10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로의 한 까페에서 만난 장태정 역의 박정철은 “사실 역할을 맡은 나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라고 웃었다.
장태정은 극 안에서 끊임없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반복한다. 극의 후반부에 가서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싶을 정도로 장태정 위주로 진행된다. 컵라면을 뒤집어쓰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드라마를 촬영하며 ‘대체 누가 천상여자냐, 제목 바꾸자, 천상 남자로’라는 소리도 많이 했어요.”
일일극이었던 ‘천상여자’의 방영시간은 약 35분. 그 중 장태정의 분량은 회를 거듭할수록 늘어나 마지막에는 극의 거의 모든 진행이 장태정을 위주로 진행됐다.
“감독님께 엄살도 부려봤어요. 다른 드라마에 비해 조금 더 힘들었거든요”라며 “감독님이 어쩔 수 없다고 그러시던데요. 장태정이 빠지면 극의 진행이 안 되니까.” 6개월 동안 일주일에 6일, 빡빡한 일정 속에 연신 위기에 몰리고 고비를 넘기는 악역을 맡다 보니 살도 자연스레 빠지고, 낯빛이 나빠졌다.
“일일극이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기도 했어요. 신선한 진행을 시도하기 쉽지 않은 것이 쉽지 않죠.” 긴 극의 호흡 안에서 오랜 시간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당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확고한 캐릭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연기했기에 박정철에게 마지막 회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는 장태정은 더욱 와 닿지 않았을 법도 하다. 박정철은 “사실 나도 작가에게 차라리 태정이를 죽여 달라고 했다”고 의외의 말을 했다. 태정은 어떤 상황에서든 극단의 선택을 해왔던 인물이기에 정상으로 돌아와 참회하는 모습보다는 상응하는 최후를 맞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말이라는 것.
“이렇게 독한 악역은 처음이기에 후유증에도 많이 시달렸어요. 잠이라도 푹 자면 좀 나았을텐데, 누군가에게 분노하는 감정이 계속 남아있는 채로 그 위에 새로운 분노를 쌓았죠. 예상을 못 한 것은 아니지만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스스로 상처받기도 했어요.”
박정철은 극이 진행되던 지난 4월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는 8세 연하의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심지어 결혼식도 박정철에게는 즐겁고 행복하기만은 않았다고.
“결혼 전 날에 주인공인 윤소이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촬영했어요. 윤소이가 ‘너는 살인자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에 제가 상처를 받고 다음 대사를 까먹어 NG가 난 거예요. 결국 윤소이에게 ‘나 내일 결혼하는데 살인자가 뭐냐’라고 말했어요. 대본인데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런 일들이 반복되며 인생의 가장 기쁜 순간도 온전히 즐기지 못했죠. 지금도 후회가 커요.”
박정철은 다음에는 생활감 있는 배역을 해 보고 싶다고 털어놨다. 작위적인 악역 대신 주말 가족 드라마 같은 따뜻한 대본 속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사람 냄새’나는 캐릭터를 맡아보고 싶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정태가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에요. 저에게는 의미가 큰 배역이죠. 운이 좋아 하고 싶은 역만 만나는 것 보다는 제가 잘 해낼 수 없겠다 싶은 역할들도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싶어요. 스스로를 여러 가지 배역으로 갈고 닦아 보면 제 연기에도 저만의 색깔이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
이은지 기자 rickonb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