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대중문화는 우리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산업 하나만 떼놓고 봐도 1년 극장 관람객 입장권 매출액은 1조 5000억원(2013년 기준)에 달하죠. 현재 한국에 사업자로 정식 등록돼있는 영화 제작사는 약 2000여개. 그만큼 규모가 큰 산업이며, 종사자도 엄청납니다. 배우들은 영화 한 회에 억 단위 개런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그 멋진 광경 뒤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신조어 중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로지 열정을 위해서라면 적은 돈도 개의치 않는 젊은 창작자들을 이용해, 반대로 ‘열정’을 핑계로 정당한 임금 지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중문화산업계에서 ‘열정페이’ 사례를 찾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예술인복지법 개선을 위해 나섰지만 현업 종사자들은 “제대로 대우 받으려면 멀었다”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급시키려 만든 제도와 ‘열정페이’뿐인 실무 간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산업 현장? 종사자들의 인식? 교육 환경? ‘열정페이 같은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할만한 콘텐츠를 만들면서 정작 즐겁지 않은 대중문화 종사자들을 인터뷰하고 문제점을 알아봅니다. 현업 종사자들이 원할 경우 인터뷰는 비실명 처리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SM엔터테인먼트 김영민 사장, 그룹 슈퍼주니어의 이특, 작사가 김이나 등 대중문화산업 관계자를 만나 산업의 취약점을 보완할 방법을 물었다. 이 자리에서 김이나 작가는 문화계 ‘열정페이’를 언급하며 대중문화콘텐츠 제작사와 제작 스태프 노동 환경 개선을 요청했다. 이에 관해 문 대통령은 “대중예술, 특히 한류는 미래성장 산업이라는 산업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하다”라며 “정부가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제도를 완비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의견과 방안을 모아주면 새 정부에서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열정페이’ 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며 대중문화산업의 노동 문제도 조명됐다. ‘K팝’ ‘한류’ 등을 만들어낸 화려한 산업의 이면에는 ‘문제적’ 시스템이 존재한다. 한국 대중음악 시장은 지난 20년간 K팝을 중심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관련자들의 노동 환경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요 기획사에서 근무하며 불합리한 시스템을 목도했던 D씨는 제도 개선과 더불어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입을 열었다.
▲ 대형 가요 기획사에서 일하던 D씨는 왜 사표를 냈을까
D씨는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취업난이 심각한 시대, 선망하던 회사 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D씨는 퇴근 후에도 휴일에도 업무 확인을 위해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자신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D씨는 고민 끝에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D씨가 몸담았던 엔터테인먼트사는 국내 최고의 가요 기획사 중 한 곳이었다. 음악을 좋아했기에 택한 일이었고 관련 산업에 종사한 경험도 있었다. D씨는 국내 기획사 중 손꼽히는 규모의 회사에서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일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입사했다. 하지만 입사 후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달랐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회사 중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에 체계가 없었어요. 앨범이 나오면 각 부서의 담당자가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해 일을 진행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죠. 어떤 팀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난감했어요. 거의 모든 일이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전문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지시하면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현실화하는 구조로 진행됐어요. 겉으로 봤던 것과는 아주 달랐죠. 그런 부분에 많은 실망을 했어요.”
K팝이 주요 문화 콘텐츠로서 유망한 산업으로 주목받은 것과 달리 K팝을 제작하는 시스템에는 질서가 없었다. 많은 일이 그렇게 진행되다 보니 근무는 자연스럽게 퇴근 후까지 계속됐다. D씨는 “표면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나인 투 식스’(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 하는 것)를 했지만, 퇴근 후에도 일은 지속됐다”고 강조했다.
“팀마다 달랐지만, 우리 팀은 제시간에 출근해 제시간에 퇴근하긴 했어요. 그런데 퇴근을 해도 일이 계속되는 게 문제였죠.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고 회사를 나서도 위에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즉각 반응해야 했어요. 휴대전화 메시지를 바로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분위기였죠. 저녁 약속에 갔는데 갑자기 일을 지시해서 식사 자리에서 랩톱을 켜고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주말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근무 외적인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이 업계는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견디기 힘들었죠.”
일은 계속됐지만, 야근수당이나 주말근무수당은 지급되지 않았다. 업계 특성 상 근무 시간이 길고 유동적이라면 그에 맞는 임금이 지급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D씨는 “야근수당은 이미 월급에 포함된 것이란 말을 듣고 당황스러웠다”고 밝혔다. 업무 별 특성을 파악하고 노동 강도에 맞게 임금을 책정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근무량이 많고 노동 강도가 높은 것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라면 그에 맞는 보수라도 지급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부서별로 하는 일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다면 그에 맞는 임금 체계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티스트 매니저의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정말 24시간을 일하기도 해요. 당연히 보수는 그만큼 지급되지 않고요. 특성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대신 이런 현실을 당연시하며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니까 상황이 바뀔 수 없는 거죠.”
D씨는 “다른 곳과 비교해 자신이 일했던 회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털어놨다. 업계 근무환경의 평균이 너무 낮은 탓이다. D씨는 “전 직장이 대형 기획사였기 때문에 근로계약서도 작성했고 임금도 업계 평균에 비해 높았다는”고 말했다. 규모가 작은 기획사의 경우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곳도 많고, 직원이 많지 않아 업무량은 증가하는데 임금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적은 임금을 받는 게 당연한 분위기 때문에 노동자는 쉽게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좋아서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의 건강한 열정은 부당한 현실에서 빠르게 소진된다.
“제가 다니던 회사는 업계에서 그나마 평판이 괜찮은 편이에요. 그런데도 평균 근속기간은 몹시 짧죠.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고용한 직원의 열정을 다 빼먹는다’는 말을 했어요. 이렇게 모두가 문제를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인식이 팽배하죠. 처음에는 직장을 옮기기도 해요. 하지만 이직을 해도 어디서나 마찬가지란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 멈추는 거죠”
퇴직 후에도 D씨는 여전히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중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분야를 좋아해서 일을 시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업계를 떠나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D씨는 “관련 정책과 동시에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대중문화산업의 근무 환경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