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 오를 때도 어지럽다 아입니까.” 포항의료원 관계자의 말.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여진은 편두통 같다. 포항 주민들은 저릿하고 날카로운 공포에 떤다. 무섭다.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지진의 위협에 시민도 나라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영하로 떨어진 온도에 지급받은 담요로 몸을 감싸보지만, 칼날처럼 예민해진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다. “밀지마세요”, “누가 밀었다고 그래요.” 하릴없이 지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이재민들은 사소한 일에 얼굴을 붉힌다. 이곳은 강진이 휩쓸고 간 포항, 포항이다.
이번 포항 강진 이후 이틀이 지나서야(11월 17일) 정부는 ‘포항 현장심리지원단’을 꾸렸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국립부곡병원, 경북·포항 남·북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소속 의료진들은 이재민 대피소 등지에서 심리 지원을 수행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기자가 현장에 도착한 16일에는 포항의료원을 중심으로 이동식 의료지원차량에서 심리지원이 이뤄질 뿐, 당시 현장에는 ‘포항 현장심리지원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21일 복지부는 ‘포항 현장심리지원단’에 국립정신건강센터, 국립나주병원, 국립공주병원, 국립춘천병원 등 5개 국립병원의 정신과 전문의와 정신건강간호사 등 의료진 19명이 추가 확충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재차 발표했다. 의료진은 정신과 전문의 6명과 정신건강전문요원 27명 등으로 구성된다는 게 복지부의 설명이다. 또한 보도자료에는 “지난 해 9월 경주지진 심리지원 당시의 경험을 살려 최선을 다해 포항시민의 재난 트라우마를 예방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와 포항 강진 초기의 ‘구멍’은 꽤나 컸다. 트라우마의 초기 골든타임은 과연 제때 메워졌을까.
◇ 우왕좌왕, 혼란의 도가니
“또 싸운다.” “걸핏하면 싸우네.” 16일 오후 포항시 북구에 위치한 흥해실내체육관. 두 사내가 속삭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싸움을 벌이는 50대 남성은 입을 다물었지만 화를 참지 못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지진 이틀째가 지났지만, 체육관은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운전 중에 양쪽에서 풀럭풀럭 했다 아입니까. ‘지진이다’ 생각하는데, 뒷좌석에서 손님은 소릴 지르고 난리도 아닙디다.” 포항 역에서 체육관까지 이동하는 동안 택시운전사 정동식씨(50·가명)는 당시 상황을 두고 “끔찍했다”고 말했다. 북구 장흥동에 있는 그의 원룸은 아수라장이 됐다. “도둑이 들었나 싶었는데, 지진 때문에 흔들려서 다 쏟아진거라요.”
포항 북구 경찰서는 지진에 박살이 났다. ‘출입금지’ 라인이 쳐진 곳은 비단 경찰서뿐만이 아니었다. 북구 시내 곳곳은 강진과 여진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피해가 가장 큰 곳은 진앙지(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의 주민들이다. 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된 주민들은 흥해실내체육관 등으로 급히 피신했고, 기약 없는 대피 생활을 버티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피신할 여력도 없었어요. 지진이 있었던 날밤(11월 15일) 무서워서 잠을 잘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이튿날 체육관으로 ‘도망’쳤어요.” ‘직장맘’인 김현주씨(45·가명)는 회사-체육관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체육관에 한꺼번에 1000여명의 이재민이 몰린 탓에 샤워시설 등이 부족해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거나 세면을 하는 형편이다.
김씨는 “집을 정리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비단 김 씨뿐만이 아니더라도 이재민들의 한숨은 멈추지 않는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당장 부서진 집의 복구부터 시작해 답답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밤 10시 체육관에 불이 꺼지고 난 후에도 곳곳에서 한숨은 계속 나왔다. 현장에서 심리상담을 다룬 의료진들은 이재민들에게서 외상후스트레스반응(posttraumatic stress responses)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외상후 스트레스반응은 외상(이나 재난 상황) 이후 발견되는 공통적인 증상을 말한다. 해리, 짜증, 분노, 비탄, 죄책감 등의 정신적 어려움이 대표적인 반응이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포함한 외상후스트레스후유증은 이러한 외상후스트레스반응이 심각하게 지속되는 경우다. 주된 원인인 정신적 충과 직접 연관이 있는 증상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급성스트레스반응(acute stress reaction), 급성스트레스장애(acute stress disorder, ASD),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진행된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외상후 스트레스반응의 주요한 원인은 지진 등 재난 상황에서 비롯된 ‘상실’과 연관이 높다고 분석한다. 전남대병원이 세월호 참사 이후 보고한 ‘국내 사례 조사를 통한 재난 현장 정신건강지원 대책 개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상실의 범주와 종류는 다양한데, 예를 들면 ▶생명의 위협 ▶신체부상 ▶친인척 및 지인의 사망 ▶생계·터전·재산 등의 물질적인 손실 ▶삶과 미래에 대한 계획·희망·자신감·소속감·신뢰과 같은 심리적 자원의 소실 등이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업무 수행 능력 감소를 비롯해 우울증 등의 여러 정신질환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보고서는 대형 참사나 대규모의 자연재해 등의 재난으로 인한 정신의학적 문제와 이로 인한 직간접적인 사회경제적 손해는 매우 크다고 경고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세월호 참사, 지난해 경주지진을 비롯해 이번 포항 강진까지 인재와 천재지변으로 인한 여러 재난이 발생하고 있지만 ‘정신건강’ 관리의 미비함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재난에 대한 정신건강 관리는 미국과 일본의 경우가 모범적이다. 미국은 지난 1989년 국립 PTSD센터(National Center for, PTSD)를 설립, ‘심리적 응급조치(Psychological First Aid)’부터 재활치료까지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일본은 효고외상성스트레스연구소(HITS)에서 ‘재해지역 정신보건의료 활동지침’을 마련, 체계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 “누가 뭐랍디까?” “아니, 이 사람이.” 또다시 언쟁이 벌어졌다. 집이 파손됐거나, 여진의 공포로 귀가가 어려운 이들은 대피소의 열악함을 호소했다. 흥해읍사무소 공무원들은 구호품을 나르고 배분하는 것만 열중하는 모양새였다. 현장 책임자는 읍장이었지만, 그마저도 이재민 관리가 본인의 일일뿐이라고 손을 내저었다.
포항시청은 16일 밤이 되어서야 현장에 공무원들을 급파, 이재민 현황 파악에 나섰다. ‘주먹구구식’, ‘사후약방문’이라는 시민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공무원들에게 화를 내는 시민들도 여럿. 정신의학 전문가가 아닌 기자의 눈에도 이재민들의 심리상태는 상당히 불안해보였다.
보건당국은 현장심리지원을 펼치겠다고 계속 밝혔지만, 지역에서 만난 한 의료기관 관계자는 “심리상담의 특성상 불특정 다수의 이재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별도의 상담공간은 필수인데, 특히 정신과 상담과 관련해 주변의 눈을 의식하는 경향이 많아 실효성에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고 귀띔했다.
“여진이 계속된다잖아요. 저는 그렇다 쳐도 애들은 어떡해요.” 현장에서 만난 이영숙(46·가명)씨가 울먹이며 말했다. 공무원들은 현황 파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구호물품으로 제공된 간식을 입에 물고 대피소 곳곳을 뛰어다녔다.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재민들의 불안도 멈추지 않았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