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2010년 같은 직장에서 임신한 15명의 간호사 중 5명이 유산하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천성 심장질환아에 대한 산재보상이 거부돼 현재 이들은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들이 소송을 통해 산재보상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는 법의 한계 때문이다. 현행법은 유·사산한 경우에만 산재보험을 적용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여성가족부(장관 정현백)는 최근 임신 중인 노동자가 업무상 유해인자에 노출돼 미숙아 또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 산재보험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을 추진할 것을 고용노동부,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에 권고했다고 4일 밝혔다.
여가부는 헌법상 모성보호의 의무(제36조제2항)와 여성 근로자 보호의무(제32조제4항)에 반한 것으로 보고 이 같은 권고를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해당 부처들은 다음달 4일까지 개선계획을 수립하고, 내년 5월까지 법률개정, 예산반영 등 개선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 산재보험 중심 ‘산업안전 정책’
여가부는 특성별영향분석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전통적으로 남성의 직역(職域)으로 여겨지던 산업 분야에 여성 진출이 늘어나고, 신규 화학물질 등 위험요인이 증가함에도 산업 현장에서 여성노동자의 모성보호를 위한 법‧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것으로 분석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을 비롯한 산업안전보건법령에서 임산부 노동자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거의 전무하다. 또한 임신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에게 유해한 화화물질은 노출기준이 설정된 것 외에는 산업안전보건법령상 규제를 받지 않는 경우가 다수였다.
여가부는 이를 토대로, 사업주와 임신 노동자에게 취급 물질의 유해성 및 위험성 정보를 제공하고, 구체적인 안전‧보건상의 조치방안(가이드라인)을 마련‧배포하라고 권고했다. 산업안전보건분야의 근로감독관 직무교육에 여성 노동자의 모성보호 조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라는 내용도 함께 권고했다.
또한 임신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과 관련,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임신노동자의 유·사산이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확인되면 산재로 인정될 수 있음에도 법적 명문화된 근거가 없어 사업주나 여성노동자들이 인식이 낮아 실제 신청이 저조한 실정이었다. 실제로 여성노동자의 유산이 연간 4만 건을 상회한데 비해 최근 5년간 유산 관련 업무상 재해 신청은 4건에 불과했다.
또한 임신 중 업무상 유해인자에 노출되어 태아가 미숙아 또는 선천적인 장애나 질병을 갖게 된 경우 현행법에 따르면, 태아에 대한 보상은 불가능하다. 여가부는 업무상 질병의 구체적 인정기준에 유‧사산을 명시하고, 태아의 건강 손상에 대해서도 산재보험을 적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입법 방안을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고용노동부는 임신 중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 보상방안에 대해 올해 중 연구용역을 실시, 그 결과를 토대로 입법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예술인 복지 및 지원 정책은?
문화예술계는 여성 진출이 활발함에도 불구, 여성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용이 불안정하고 낮은 소득 수준을 보였다. 현행법상 예술인사회보험 지원, 창작준비금 지원 등 각종 복지 지원 사업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최근의 활동 경력을 제출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한 ‘예술 활동 증명’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경력 단절된 여성예술인은 각종 지원정책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비록 심의위원회가 경력단절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밝혔지만, 경력단절 사유에 따른 구체적 심의 기준이 없어 위원회의 다소 자의적인 해석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여가부는 경력단절 여성예술인에 대한 예술 활동 증명 심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관련해 예술인 자격여부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대표성 확보를 위해 심의위원회 구성 시에도 성별을 고려하도록 했다.
이밖에도 여성예술인이 일반 보육시설을 이용할 시 입소 우선순위에 해당하는 ‘맞벌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재직증명서, 근로계약서 등이 요구되는데, 이는 실제로 일(예술 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경제활동 증명이 어려운 예술인의 직업적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지적됐다.
이에 여가부는 여성 예술인이 단절 없이 일할 수 있도록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발급하는 ‘예술 활동 증명’을 취업 증명으로 인정하는 등 현재의 취업증명의 인정 범위를 확대할 것을 권고했다.
관련해 여가부는 문화예술계의 무계약 또는 구두계약 관행에 따른 권익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개발해 보급하고 있는 ‘표준계약서’ 상에 사용자의 성차별 금지 의무, 모성보호 관련 내용을 명시할 것을 권고했다.
◇건강지표를 바탕으로 한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
여성은 남성에 비해 소득, 주거, 고용 및 의료서비스 접근 등 사회시스템 및 구조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더 많이 경험하고, 성별에 따라 건강의 위험요인과 수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제4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서 6개 분야, 27개 중점과제, 357개 지표 가운데 성별 구분이 된 지표는 34개에 불과했다.
성별 구분된 지표도 주로 건강생활실천 분야 및 만성퇴행성질환 관리 분야 중 금연과 절주 및 비만에 관한 것에 한정돼 있었다. ‘대표지표’로 관리되는 17개 지표 중 ‘성인 연간음주자의 고위험 음주율’과 ‘성인 비만 유병율’을 제외하고는 성별 구분된 지표가 전무했다.
여가부는 가능한 모든 지표에서 성별 구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기본계획 상 지표 중에 성별을 구분해 관리할 필요가 있는 지표, 국제사회의 성별 구분된 지표 중 신규로 반영할 필요가 있는 지표 등의 목록을 보건복지부에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차기 계획 수립 시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이건정 여가부 여성정책국장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지만, 여성들이 노동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에 그동안 우리사회가 귀 기울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라며 “여가부는 그동안 아무도 살피지 못했던 영역의 빈틈을 메운다는 자세로 앞으로도 정부 각 부처의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살피겠다”고 밝혔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