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악습 ‘태움’,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태움 전염되다①]

간호사 악습 ‘태움’,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태움 전염되다①]

언어·행동 폭력에 시달린 간호사들…“죽고 싶었다” 호소
영화 ‘인플루엔자’로 비춰본 간호사 ‘태움’ 현실

기사승인 2022-08-30 06:01:07
                                                                                                             픽사베이

분주한 병동 모습.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그곳이 누구에게는 지옥이 된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마치 독감 바이러스처럼 소리 소문 없이 퍼지는 그들만의 폭력 문화가 만들어져 있다.

대학병원 입사 6개월 된 차은영씨(익명, 24세·여)는 인계 시간, 선배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손발이 차가워져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그렇게 환자 차트를 보며 달달 외웠건만 인계가 시작되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머리는 왜 달고 살아? 그 머리로 국가고시는 어떻게 합격했어?” “부모님이 외국분이시니? 외계인이신가?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듣지?” “네가 맡은 환자만 불쌍하지. 내가 너라면 환자한테 미안해서라도 간호사 때려치우겠다.” “생각 없이 계속 다니는 너도 진짜 대단하다.” 

‘태워도 타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젖은 장작’이란 별명을 얻고 난 뒤, 본격적인 ‘유령’ 취급이 이어졌다. 근무 동안 선배들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스테이션에 세워두기만 했다. 환자 처치를 보려고 하면 커튼을 쳐버리고, 회진 시간에는 침상 정리하라며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동기들과도 동떨어져 가고 결국 이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은영씨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멍청할까’ 생각했다. 공부도, 아르바이트 생활에서도 줄곧 ‘잘한다’ 평가 받았던 나는 병동에만 가면 한 없이 작아졌다. 아니 차라리 소멸되고 싶었다”며 “출근 전마다 차도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내가 교통사고가 나면 그들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갖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다”고 토로했다.

영화 인플루엔자 속 한 장면. 주인공 다솔과 은비가 선임간호사에게 불려가 태움을 당하고 있다.   네이버 영화

1년 남짓 종합병원 내과병동 간호사로 근무했던 최지희씨(가명, 27세·여)는 공황장애, 우울증까지 생겨 아예 다른 직업으로 직종을 바꿨다. 그는 선배들의 일방적인 괴롭힘은 버틸 만 했지만 후배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스트레스가 배가 됐다고 말한다.

신입 간호사를 맞이한 지희씨는 후배에게는 잘해줘야겠다고 맘먹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신입은 말수도 없고 행동도 느려 입사 일주일 만에 윗년차들의 태움 대상이 됐고,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선배들 사이에서 버티기 위해 모질게 굴어야 했다.

“쟤(후배) 하는 짓 좀 봐. 선배면 본보기를 보여야지. 네가 개판이니까 밑에 후배도 개판으로 일하는 거 아니야.” “막내가 다 이해할 때까지 집에 갈 생각하지 마라. 다음에 물어봤는데 모르면 그때는 둘 다 진짜 가만 안 둬.” 

지희씨는 어느덧 후배에게 욕설과 강압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잘 가르치지 못한 자신 탓인지 노력하지 않는 후배 탓인지 그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른 채 하루하루 말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신입은 말도 없이 퇴사했고, 태움의 화살은 다시 지희씨에게 향했다. 그도 결국 병원을 그만뒀다.  

지희씨는 “일상이 없었다. 1~2시간 일찍 출근하고 3~4시간 늦게 퇴근하는 데다, 일이 끝나도 다음 근무 번 선생님의 전화가 계속 와 쉴 시간도 주지 않는다”며 “그렇게 1년을 버텼고, 내가 끝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환경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 병원마다 병동마다 분위기가 다르다지만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는 어디든 있고, 그 숨 막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눈물을 흘렸다. 

2021년 태움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한 故 서지윤 간호사의 추모식 모습.  쿠키뉴스 자료사진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규율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들 모두 오랫동안 간호사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뛰어왔지만 태움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영화 '인플루엔자' 안에서는 그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다솔은 작은 시골마을 병동에서 일하는 3개월 차 간호사로 선배로부터 폭력 및 욕설 등의 태움을 당하고 있었다. 다솔은 태움 문화에 치를 떨며 ‘절대로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신규 간호사 은비의 교육을 받게 되면서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도 신입인데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것도 큰 부담이지만, 그들을 지원하긴 커녕 잘못됐다고 사지로 내모는 선임과 수간호사, 그리고 급박한 업무 환경들이 다솔을 태움에 물들이게 한다. 결국 다솔 역시 처음 은비에게 친절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무시·언어폭력·방관하게 된다. 영화는 이를 ‘인플루엔자’처럼 전염된다고 표현했다.

간호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만큼 촌각을 다퉈야하는 근무 환경이다. 하지만 많은 병원들이 충분하지 않은 인력으로 굴러가고, 그마저도 몇 없는 중간연차 간호사들이 신규 교육과 업무를 모두 수행해야만 한다.

태움은 이러한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비롯된다. 교육해줄 여유가 없는 선임간호사와 충분히 교육받을 수 없는 신입 간호사 사이 간격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선임간호사들은 신규가 알아서 잘해주길 바라고, 신규는 정신없이 굴러가는 업무만으로도 벅차다.

영화 속에서는 이를 ‘달리기’를 통해 표현했다. 영화 중반, 다솔과 은비, 선임 간호사, 수간호사가 마치 컨테이너벨트 위를 달리는 모습이 연출된다. 은비와 속도를 맞춰가던 다솔은 이내  뒤도 보지 않고 뛰어가 버린다. 여기서 영화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만 가게 만드는 사회와 결국 적응한 채 살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내비춘다.

그리고 컨테이너벨트에서 버티지 못한 간호사들은 이직을 선택한다. 혹은 故 박선욱, 故 서지윤 간호사와 같이 극단적 선택까지 만들기도 했다.

태움은 전염된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고 어디까지 퍼질지 알 수 없다. 어느 병원 한 군데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가해자와 피해자, 누구의 탓이라고 쉽게 정의내릴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열악한 근무 환경에 허덕이는 간호사들을 마주할 수 있다. 생명을 다루는 만큼 실수가 없어야 하고, 실수가 내 탓이 되는 순간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모든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적어도 충분한 인력과 교육 시간이 주어졌다면 태움이라는 것이 ‘문화’처럼 여겨질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악행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 변할 수밖에 없던 그들의 배경 속 맥락과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근무 구조, 근무 환경, 간호인력 부족, 초과근무가 당연시 되는 이런 요소들이 결국 ‘을-을’ 갈등을 불러오게 되는 현재의 시스템을 비판해볼 필요가 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박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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