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하루 앞둔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 큰불이 났다. 3시간 가까이 타오른 불길은 약 820평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약 60명 주민이 터전을 잃었다. 화재 이후 약 한 달째인 17일 쿠키뉴스가 찾은 구룡마을은 전혀 복구되지 못한 채 화마가 할퀴고 간 상흔을 여전히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화마가 삼킨 건 집뿐만이 아니었다
구룡마을 입구부터 화재가 발생한 4구역으로 가는 길목마다 화재의 후유증으로 남은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나무 합판과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진 집들은 좁은 골목을 빼곡히 채워 여전히 화재에 취약한 모습이었다.
키가 작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지나는 상수도관은 불안하게 연결돼 길 곳곳에 물방울을 떨어뜨렸고, 화재 구역의 주민들은 그나마 나오는 찬물에 감사하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구청과 서울주택도시공사(SH)에서 마련한 공공 임대주택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생겨나면서 생긴 빈집도 곳곳에 보였다.
화재가 발생한 4구역은 화재가 난지 한 달가량이 됐지만 어떠한 복구도 되지 않은 상황이다. 겨우내 주민들이 가정에서 사용하기 위해 모아놓은 연탄은 써보지도 못한 채 나뒹굴어 있었고 타버린 사진첩은 이곳이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삶의 터전이었다는 걸 알렸다.
구룡마을 주민 A(71)씨는 잿더미가 된 동네를 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내 그리고 지금은 결혼한 자녀와의 어린시절 추억이 깃든 A씨의 집은 화마에 무너졌다. 20일이면 이재민들은 지자체에서 임시 거주시설로 지원하고 있는 호텔에서 나와야 한다.
이재민들의 선택지는 사실상 두 가지다. 호텔에서 나와 SH가 정한 임대주택으로 이동하거나 천막에서 지내는 것이다. 비상대책위원회 등에 따르면 화재 구역에 대한 복구는 더딘 상황이다. 주민들은 화재지역 복구에 대해 “(지자체에서) 얘기가 없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돌이표 재개발·이주 논쟁
서울시는 구룡마을을 공영개발하기로 결단을 내린 상황이다. 30년째 무허가 판자촌의 모습을 한 구룡마을은 부지 규모만 26만4500㎡에 달해 꾸준히 개발 압박이 있었다. 1990년부터 재개발 얘기가 나오다가 2011년 공영개발 계획이 마련됐지만 관련 주체 간 갈등으로 사업이 오랜 시간 표류했다.
그러나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달 20일 화재 현장을 찾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재개발 사업을 언급했고, 김헌동 SH 사장도 “구룡마을 재개발 사업은 빠르게 추진될 것”이라고 발언하며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시는 조만간 토지보상 공고에 돌입할 예정이다. 일부 토지주는 공시가격이 아니라 길 건너 주변 아파트 단지 땅값 시세에 준한 보상을 원하지만 SH공사는 감정평가에 따른 공시가격 기준으로 보상 절차에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보상과 개발방식을 두고 주민들과 토지주, 시와 강남구 간 견해가 충돌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SH가 파악한 현황에 따르면 구룡마을에는 총 1107가구가 있다. 전입신고가 되지 않은 가구까지 포함하면 약 2000가구가량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전입신고 등 근거가 있어야 보상이 가능하다. 전입신고가 된 1107가구에 대해서는 임대 아파트와 임대료 40% 할인, 현물 이주지원 등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주민들의 의견은 제각각이다. 구룡마을에는 보상 등을 두고 7개의 자치단체가 다른 요구안을 내고 있다고 한다. 실제 구룡마을 입구에는 각기 다른 자지단체가 ‘임대가 아닌 내 집에서 살고싶다’ ‘5년 분양전환 임대아파트를 공급하라’ 등의 다른 요구사항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임대주택을 두고 현실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30년간 구룡마을에 살았다는 주민 B씨는 “(정해진 임대아파트 평형은) 식구가 3~4명인 가구에는 20평, 1~2명인 가구에는 10평대 초반”이라며 “여러 이유로 현재 세 식구가 살고 있어도 주민등록상에 1인으로만 돼 있는 집들은 10평대로 가야한다. 실질적으로 살기가 어려운데 누가 가려고 하겠나”라고 말했다.
거주민들에 따르면 현재 임대주택으로 이동한 이들 중 일부는 방 한칸밖에 없는 작은 집에서 불편을 겪어 다시 구룡마을로 돌아오고 싶어한다고 한다. B씨는 “분양권 바라는 것 아니고 임대아파트도 공짜로 해달라는 것 아니다”라며 “최소한 가족들과 다같이 편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렴한 임대주택이지만 임대료와 관리비 등 금전적 부담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게 일부 주민들의 목소리다.
A씨는 “여기 주민들 대부분이 고령층”이라며 “몇 십만원 정부 지원금으로 사는데 월 20~30만원가량 되는 임대료와 관리비는 낼 형편이 안 된다. 기존에 임대주택에 가서 임대료를 내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지인들도 봤다”고 말했다.
집터도 남지 않은 잿더미들을 바라보며 A씨는 “이 동네 사람들은 서로 집에 수저가 몇 개 있는지도 알 정도로 가깝다. 저기 평상은 마을사람들과 같이 밥도 해먹으며 지내던 곳”이라고 추억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던 어르신들에게 임대아파트는 답답할 것. 사실상 죽으러가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덧붙였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