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난생 처음 칭찬받았다며 수줍어한다. 데뷔 17년 차인 배우 송혜교. 수많은 작품을 거쳤고 오랫동안 스타의 자리에 올라 군림하면서도, 정작 ‘연기 잘한다’는 칭찬에는 늘 목이 말라 있었다.
기분 좋을 법하지만, ‘어리둥절’에 가까운 표정이다. 한층 깊어진 연기와 작품을 택한 안목에 대해 칭찬하자 손사래를 친다. “전 타고난 배우가 아니라서요, 노력해야만 남들 하는 만큼 쫓아갈 수 있어요.” 겸손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뼈 있는 고백이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는 3일 종영한 SBS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를 만나면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겨울’은 배우로서의 성취감을 안긴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해준 작품이었다. 함께 호흡을 맞춘 조인성은 앞서 기자간담회에서 “송혜교 씨의 연기가 절정인 것 같다”고 했다.
“평소 칭찬을 못 듣다가 이번 작품을 통해 많이 해주셔서 정신이 없더라고요. 칭찬을 못 받다가 받으니 작가님이 ‘칭찬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받는다고 마냥 좋아하지 말고 어디를 칭찬했는지 잘 기억해 뒀다가 써먹으라’고 말해줬어요.(웃음)”
인터뷰를 위해 서울 이태원동에서 만난 그에게서 피곤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회 방송 사흘 전 이미 모든 촬영을 끝낸 터였다. 국내 드라마 여건상 이례적이다. 반(半) 사전제작 드라마여서 가능했다. ‘쪽대본’과 ‘생방’은 ‘그 겨울’과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복병은 따로 있었다. 시간적 여유와는 달리 심리적 압박감은 여느 때보다 심각했다. 시각 장애인이라는 설정과 늘 긴장감이 넘치는 서스펜스의 난관 때문이었다.
“다른 드라마보다 스케쥴이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소모하는 신이 많아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있었어요. 내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감정의 끝까지 가본 것 같아요. 너무 힘들고 괴로웠는데 그 시간마저도 행복했고 그리워요. 심적으로 자주 울컥울컥 했던 이 작품을 보내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겨울’은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겜블러 오수(조인성)와, 시각 장애인인 외로운 대기업 상속녀 오영(송혜교)가 만나 차갑고 외로웠던 삶에서 희망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과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 등에서 호흡을 맞춘 김규태 감독과 노희경 작가가 다시 한 번 뭉쳐 제작 단계부터 화제가 됐었고, 수려한 영상미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수목극 1위를 수성하며 그 열기를 이어갔다.
“캐릭터 자체가 외로운 역할이었어요. 눈을 보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듣고만 있으니까 ‘혼자 연기하고 있나?’ 하는 느낌도 들었죠. 그분들은 그러지 않았는데 왕따 같은 느낌도 혼자 받고요. 많이 외롭기는 했지만 캐릭터 자체가 그런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각 장애인이라는 부분이 캐릭터에 더 동정심을 준 것 같아요. 조금 느낄 수 있는 외로움도 극대화된 외로움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그런 부분을 시청자가 이해해 줬다고 생각해요.”
송혜교가 맡은 오영 역은 대기업의 유일한 상속녀로, 지적이고 아름답고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해 보이지만 시각 장애를 앓고 있어 외롭고 차가운 인물이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언젠가 자신이 한없이 약해질 때는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나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닫고 살아가지만 돈을 얻기 위해 가짜 오빠 행세를 하는 오수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다.
“맨 처음 촬영에 들어갔을 때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먹먹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혹시 시각 장애인분들을 제대로 담지 못해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고요. 초반부 방송이 나가고 나서 시청자분들이 제 연기에 대해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줘서 한 시름 놨었죠. 습관이 무섭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히려 지금은 눈을 보고 연기하는 게 어려워요. 다시 시선 마주치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2008년 출연한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이후 5년 만의 브라운관 복귀인 송혜교는 지난 5년간 도약의 시간을 보냈다. 해외 활동에 주력하면서도 2011년에는 국내 영화 ‘오늘’로 복귀해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대중과는 멀어져 있었지만, 작품의 흥행보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도전을 마음껏 펼쳤던 시간이기도 했다.
데뷔 17년 차 배우가 ‘성장’이라는 말을 듣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송혜교는 분명 달라졌고, 연기에 대한 그의 이야기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겨울’ 제작발표회에서 “사실 작품들이 흥행이 다 안돼서 그렇지, 계속 바쁘게 활동했다”고 말하며 멋쩍게 웃는 그의 표정은 여유로웠고, 단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 5년간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배님들이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예전에 말해줬을 때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됐어요. 연기 따로 경험 따로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들이 하나가 됐어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여자로서 송혜교로서 개인적인 경험을 하면서 그런 것들이 다 연기에 나오는 것 같아요.”
달콤한 열매는 오랜 인고의 시간을 보낸 끝에 찾아오는 법이다. 그는 “해외에서 작품을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자신과 싸우는 외로운 시간이 많았다”며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그 시기에 이 작품을 만나서 그런지 더 감정이 잘 이입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연기는 늘 어려워요. 저는 타고난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노력해야지만 다른 배우들만큼 쫓아갈 수 있어요. 이번에 특별히 노력한 점을 꼽는다면, 제가 급해지면 말이 빨라지고 발음이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연습을 많이 했고 혼자서 집에서 연습도 하고 그런 시간을 가졌어요. 단점들을 안 보이게 하려고 많이 노력했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존의 작가들은 한두 개의 감정을 표현하는 반면 노희경 작가는 대여섯 개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가 있었고, 안다 하더라도 그 깊이를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늘 안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빈틈은 상대 배우인 조인성이 채워줬다. 1회 때 드라마를 끌고 가는 조인성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끼며 ‘이 작품은 잘 되겠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시각 장애인 역할이었기 때문에 표정으로 표현을 많이 해야 했는데 클로즈업이 깊숙이 들어와서 미세한 떨림이라든지 세세한 감정을 잘 보여줄 수 있었어요. 제가 정적으로 연기했다면 인성 씨는 역동적으로 연기하니까 저 때문에 지루할 수 있었던 부분을 인성 씨 연기로 커버한 것 같아요. 호흡이 정말 좋았죠. 예전에는 무조건 ‘나만 잘해야지’ 했었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 이후부터는 신에 대한 해석을 했고 다른 캐릭터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며 오래 소식이 끊겼던 이들에게 연락이 오면서 인기를 실감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 ‘황진이’에 함께 출연했던 류승룡과는 6년 만에 안부를 나눴다. 그가 ‘너무 잘 봤다. 멋있다’고 칭찬해 준 것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연애는 안하느냐’는 질문에는 “귀찮아서”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는 “촬영으로 너무 바쁘고, 사실 지금은 조금 귀찮은 감도 있다”라며 “예전에는 주변 언니들이 ‘연애하기 귀찮다’고 얘기할 때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하는 측면도 있다. 외롭다는 생각도 크게 들지는 않아서 당분간은 연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 겨울’은 배우로서 하나의 모험이었다. 10년도 넘은 일본 드라마가 원작이었고, 국내에서 영화로 제작, 개봉되기도 했다. 리메이크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송혜교는 ‘네가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해보도록 확실히 만들어 주겠다’는 노 작가의 자신감을 믿고 선택했었다. 이러한 모험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차기작에 대한 부담은 오히려 없어요. 이번 작품이 잘 됐기 때문에 앞으로 몇 작품은 더 모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아요. 잘 안 됐으면 모험할 기회가 없었을 텐데 말이죠.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것, 재미없어도 확실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또 비슷한 캐릭터여도 작품이 좋다면 할 수도 있고요. 굳이 흥행성만 따져서 ‘무조건 상 받겠다’ 싶은 작품들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 겨울’의 오수와 오영은 다시 만났다. 서로를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며 봄날의 꽃 같은 사랑을 시작했다. 비극으로 끝난 원작과는 전혀 다른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너무 힘들어했으니, 결말은 행복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 자신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해피엔딩을 원했었죠.
오영이 부디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힘들만큼 힘들어했으니, 이제는 웃어도 되잖아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두정아 기자 violin80@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