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의료보험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손보험은 고가의 비급여 진료까지 보장하면서 점점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과다 이용과 과잉 진료라는 부작용을 양산하며 현 의료 시스템을 왜곡하는 주된 원인으로 지적돼 왔다. 실손보험이 환자 안전망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엄격한 비급여 관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19일 서울의대 융합관 박희택홀에서 ‘한국 의료제도 속 비급여, 실손보험’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서남규 국민건강보험공단 비급여관리실장은 “현재 한국의 의료 제도는 의료 접근성이 좋고 소비가 쉬운 구조로 돼 있어서 의료의 과소비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며 비급여 진료 목록을 분류해 제도 안에서 철저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짚었다. 실손보험이 전 국민에게 확대된 가운데 비급여가 적정 수준에서 관리되면 순기능이 있지만, 현 비급여 시장은 과도하게 팽창된 상태라는 설명이다.
그간 비급여 진료는 실손보험에 가입한 환자의 지불 능력과 의료기관의 수익 보전 욕구가 맞물려 의사들의 과잉 진료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필수의료 의사들의 이탈을 촉진해 지역·필수의료 체계를 붕괴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지목됐다.
총 진료비에서 비급여 진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파르게 올랐다. 건보공단의 ‘2022년도 건강보험 환자 진료비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총 진료비는 120조6000억원으로 나타났다. 이 중 보험자 부담금은 79조2000억원, 법정 본인부담금은 23조7000억원, 비급여 진료비는 17조6000억원으로 추산됐다. 2015년(11조5000억원)부터 이어져온 비급여 진료비 증가는 2020년(15조6000억원) 코로나19 대유행의 영향으로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특히 요양병원 암 환자는 비급여 진료가 많다. 2022년 요양병원 암 환자의 비급여 비중은 67.4%로, 종합병원(39%)이나 상급종합병원(33.6%)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서 실장은 “비급여 중에서도 치료적으로 꼭 필요한 비급여가 있고 선택해도 되는 비급여가 있는데 요양병원은 선택적 비급여가 많은 상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암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방사선 치료 후 원장으로부터 비급여인 면역주사를 권유받은 사연을 소개하며 “비급여가 발생하는 것 자체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질과도 관련돼 여러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혼합진료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확립돼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2월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 항목을 퇴출하는 등 비급여 관리를 강화하기로 하고 혼합진료 금지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혼합진료는 비싸거나 크게 필요치 않은 비(非)중증 과잉 비급여 진료를 급여 진료에 끼워 치료하는 행태를 일컫는다. 가령 백내장 수술을 할 때 비급여인 다초점렌즈 수술을 하도록 한다거나, 급여가 적용되는 물리치료를 하면서 도수치료를 유도하는 식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혼합진료가 늘면서 백내장 치료에 들어간 건강보험 진료비는 연간 1600억원에 달한다. 물리치료에 들어간 건강보험 진료비는 연간 640억원을 기록했다.
서 실장은 “혼합진료가 이런 식으로 많이 이뤄지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며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져왔기 때문에 혼합진료 금지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모든 혼합진료를 다 금지할 순 없고 몇 가지 원칙을 세워 관리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비급여 진료 항목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비급여 진료는 의사가 부르는 게 값이다. 표준화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병원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그는 “적어도 어떤 의료행위를 하더라도 안전한지, 효과는 좋은지, 가격은 어떤지 등이 명확해야 한다”면서 “비급여 목록이 정확히 정리돼 있지 않은 탓에 청구가 제각각인데 손을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비급여 진료와 실손보험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 의료계, 국민, 보험업계 등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서 실장은 “의사들은 비급여라는 말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는데 이러면 문제를 풀기 어렵다. 비급여 진료만 하는 의사는 앞으로 점점 많아질 테고 그렇게 되면 급여 수가와의 격차는 더 커질 것”이라며 “의료 공급자나 수급자 단체가 한두 곳이 아니라서 의견들을 조정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근거를 갖고 합리적으로 토론하면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의사들의 도덕적 해이가 비급여 시장을 잘못된 방향으로 키웠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하은진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실손보험이 처음 의료 제도 안에 들어왔을 땐 분명히 의도는 선했겠지만 그걸 이용하고 공급하고 관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덕적 해이가 퍼지면서 지금의 형태가 됐다고 본다”면서 “비급여나 실손보험을 마구 이용하는 행태를 개선하고, 소비를 조장하는 의료 전문가들의 자성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인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