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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녀’로 시작해 ‘도둑들’, ‘신세계’에서 ‘관상’까지. 올해 마흔이 된 이정재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관상’ 개봉 하루 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11일 서울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는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스크린에서 그토록 다채로웠던 사람이 이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틀을 쥐고 흔드는 수양대군, 이 남자 매력 넘친다
영화 ‘관상’의 배경은 조선시대다. 시대상 때문에라도 배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틀 안에서 일정하게 움직여 나간다. 구축된 세계를 감히 벗어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좀 다르다. 틀 안에 갇히기는 싫고, 그렇다고 그 틀을 단번에 깨부수기에는 지나치게 점잖다. 짜증스럽게 조금씩 주변의 그물을 흔들어보고, 자신이 침범해도 될 지를 가늠해보다가 주위를 폭발적으로 침식해나간다. 수양대군은 극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재는 수양대군에 대해 “수양이라는 인물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나쁜 짓만 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정말 폭군이었다면 ‘세조’가 아닌 ‘수양대군’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관상’은 세조의 이야기가 아닌 내경의 이야기죠. 주인공 내경에게 아픔을 주는 캐릭터고, 주인공 관점에서 보기에는 악한 면이 부각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악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계유정난이라는 사건은 언뜻 보기에 세조가 왕이 되기 위해 사람들을 무차별로 살생한 사건 같지만 세조에게도 그 일을 단행하기까지의 사유가 있었지 않겠나는 생각을 했어요.”
‘힐링캠프’나 ‘신세계’에서의 이정재는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사람으로 보였다. 감정을 분출하는 수양대군으로서의 연기는 어땠을까 궁금했다.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연기는, 어떤 패턴의 연기라도 어렵다”는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감정표현을 절제해도 관객들이 극중 인물의 심리상태를 다 알수 있는 것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수양처럼 정확한 감정을 분출하는 것 또한 어려웠죠. 터트리는 연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오버 액션이 나오게 되더라고요. 그게 문제였죠. 수양은 사실 항상 속이 꼬여있고 뒤틀려있는 사람이잖아요. 만족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예요. ‘내가 조카를 해치면서까지 왕이 돼야 하나’하는 마음이 항상 있는 사람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죠. 인상을 구기고 있지 않아도 남들이 ‘저 사람이 기분이 나쁘구나’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극 중에서의 수양은 항상 웃고 있지만 화를 내는 인물이었다. ‘이리’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손쉬울 리가 없었다.
“한 마디로 예민한 거죠. 극중 다른 인물에게 항상 위협감을 느끼고 있기도 하고.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건들면 바로바로 탁탁 거슬린다는 표현을 할 만큼 감정이 요동을 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불안정한 것만 보여줄 순 없었어요. 무게감을 유지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웠죠. 덕분에 촬영 내내 심리가 바닥을 기었어요. 감정 소모도 심했고.”(웃음)
그렇게 나온 연기가 만족스럽냐고 물으니 또 다른 대답이 돌아온다. “필름 자체는 만족스럽지는 않다”였다.
“한재림 감독은 ‘날 것’ 같은 인물상을 원했어요. 듣도 보도 못한 인물 있잖아요.
촬영을 하게 되면 보통 OK 컷을 위해 여러 ‘테이크’를 가죠. 보통 3-4테이크를 한다 치면 그 중에서 가장 거칠고 노련하지 못한, 어설픈 연기 컷을 쓰더라고요. 배우로서는 참 마음에 안 들지만, 다 모아놓고 보니 이것도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닌가 싶었어요.”
“일부러 영화판 기웃거렸다, 작품 많이 하려고”
2012년부터 이정재는 꾸준히 스크린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2~3년에 한 작품씩 하던 과거의 행보와는 좀 달랐다. 궁금했다. 우연히 좋은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이정재의 대답은 후자였다. 그는 “이제는 작품을 좀 많이 해야겠다 싶었다”며 “일부러 사람도 만나고 영화판도 기웃거렸다. 시나리오도 정말 많이 봤다”며 웃었다.
덧붙여 이정재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털어놨다. “어릴 때는 아무래도 인기에 연연해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며 “내가 봤을 때는 연기나 표현력도 부족했지만 잘 맞는 캐릭터를 못 찾았던 것 같다. 고맙게도 인기는 있었지만 내가 누린 것에 비해 연기력이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고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다행히 지명도나 호응도가 좀 떨어지는 대신 연기력이 원숙해지며 균형이 좀 맞지 않나”라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그의 열성 팬 같은, 발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다, ‘미남 스타’에서 ‘연기 정말 잘 하는 배우’가 되면서 인기는 더 높아지지 않았냐”고 하니 이정재는 ‘관상’에서 봤던 수양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다 차치하고, 이제는 좀 잘 해야 되지 않겠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은지 기자 rickonbge@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