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공백 사태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이 안갯속이다. 협치를 이뤄 중지를 모아야 할 여야는 제 갈 길 가기 바쁘고, 정부와 의료계는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협의체 출범이 갈수록 동력을 잃어가며 무용론까지 제기된다.
23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여·야는 의료계와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재조정’ 문제에 대해 의·정의 주장이 엇갈리며 난항을 겪고 있다. 특히 이 사태를 해결할 열쇠를 쥔 전공의·의대생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논의만 무성하다.
정부는 ‘2025년 의대 정원 협상 불가’라는 입장에서 물러설 뜻이 없어 보인다. 의료계가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는다면 내후년인 2026학년도 입학 정원을 원점에서 검토할 수 있다는 게 정부가 제시한 마지노선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22일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2025년도 입학 정원은 이미 수시 모집 원서 접수가 마감됐기 때문에 변경이 어렵다”면서 “2026년은 의료계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면 제로베이스에서 검토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대통령실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의료계가 조 장관 본인을 포함한 관계자 문책이나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데 대해선 “의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의료 정책 책임자가 공개적으로 거취를 표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선을 그었다.
정부의 행보를 비판한 더불어민주당은 24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여당 지도부가 만나는 ‘윤한 만찬’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별위원회는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디 밥만 먹고 사진만 찍지 말라”며 “의료대란을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라도 만들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2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 지도부는 국회에서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등 임원진과 비공개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2025년 의대 정원은 협상 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정부를 배제한 채 ‘여야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박주민 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위 위원장은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다는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분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얘기한 것”이라며 공식 제안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지켜보겠다”고 여지를 남겨뒀다. 의협 등 의료계와 자주 소통하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지속적으로 채널을 만들어 소통하자는 얘기를 (의협과 민주당) 양쪽이 모두 했다”라며 “구체적인 실무 작업을 거쳐 얘기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당은 추석 연휴 내내 협의체 구성 테이블을 만들기 위해 의료 단체와 접촉하며 동분서주했지만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전공의 설득에도 실패했다. 최근 한동훈 대표와 비공개 만남을 가졌던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광재 국민의힘 대변인이 ‘한 대표가 박 위원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밝힌 기사를 공유하며 “한 대표와 국민의힘에 다시 한번 유감이다. 거짓과 날조 위에 신뢰를 쌓을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한 대표는 임현택 회장과도 만났지만 협의체 참여 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의정갈등 해결을 두고 윤 대통령과 한 대표 간 ‘불화설’도 재점화 되는 모양새다. 대통령실은 24일 지도부 만찬 회동을 앞두고 한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한 데 대해 “별도로 협의할 사안”이라며 거부했다. 한 대표 입장에선 대통령 독대를 통해 협의체 구성과 의료공백 해결 등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었는데 기회를 갖지 못한 셈이다.
의료계는 협의체 참여를 바라는 여·야·정의 구애에도 팔짱을 끼고 있다. 의협은 민주당 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나온 ‘여·야·의 협의체’ 구성 의견에 대해서도 “지난 13일 냈던 입장에서 바뀐 것이 없다”고 밝혔다. 앞서 의협과 대한의학회,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전국의대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한국의대·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 걱정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불통을 멈추고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최안나 의협 홍보이사 겸 대변인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정부다”라며 “정부가 입장 변화를 보여야 협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동안 수차례 의정 협의가 이뤄졌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면서 “제대로 된 논의 구조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시기상조다”라고 부연했다. 정부가 2025년도 의대 증원 등 의료정책 추진에 대한 사과나 유감 표시 없이 마련한 협의체에 참여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여·야·의·정이 동상이몽인 상황에서 협의체가 출범하더라도 제대로 된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무용론’이 정치권과 의료계 일각에서 확산하고 있다.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은 “협의체 구성 목표는 결국 전공의 참여일 텐데, 각자 제 살 길 찾아 떠난 상황에서 전공의들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잘못됐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금 전공의들은 박단 위원장이 협의체에 들어가자고 해도 안 움직일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협의체 출범은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제21대 국회의원을 지낸 신현영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협의체가 출범하더라도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하고 논의의 진도가 안 나갈 것이 자명하다”라며 “사태 해결에 대한 해법이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문제를 수습하려고 해도 안 될 것이 뻔하며, 필수의료가 회복되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