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만 인프라 붕괴’ 고한 산부인과 의사들…“병원이 사라진다”

‘분만 인프라 붕괴’ 고한 산부인과 의사들…“병원이 사라진다”

기사승인 2024-06-05 11:00:08
대한분만병의원협회, 대한주산의학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산부인과초음파학회는 4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붕괴된 출산인프라, 갈 곳 잃은 임산부, 절규하는 분만 의사들’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신대현 기자

“분만 인프라 붕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이 땅의 현재 또는 미래의 임산부다. 그들이 갈 곳이 없고, 그들을 돌볼 의료진이 없다는 것은 모든 국민과 가정의 비참한 재앙이다.”


분만병원이 사라지고 있다. 저출산 기조에 분만 인프라까지 붕괴하며 아기를 더 낳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과 의사 양성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적정 수준의 지역별 분만 병의원을 확보해 국가 차원의 분만 인프라를 재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대한분만병의원협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주산의학회, 대한산부인과초음파학회는 4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분만 인프라가 무너졌다며 의료 소송 부담 경감, 수가 인상 등 특단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에 따르면 지난 2003년 1371곳이던 분만병원(조산원 포함)은 2012년 739곳, 2017년 582곳, 2022년 470곳으로 꾸준히 줄었다. 20년 새 65.8%가 사라졌다. 전국 시·군·구 250곳 중 22곳은 산부인과 자체가 없다. 산부인과는 있어도 분만실이 없는 시·군·구는 50곳에 달한다. 분만 병상 수와 병실 수도 모두 감소하고 있다. 2016년 2379개소였던 병상 수는 2022년 1781개소까지 줄었다. 병실 수 역시 같은 기간 1414개소에서 1176개소로 축소됐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이 문을 닫거나 분만을 접는 사례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앞서 2018년 국내 최초 여성 전문병원이자 한때 분만 수가 가장 많았던 서울의 제일병원이 경영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다. 지난해 9월 광주의 대형 산부인과인 문화여성병원도 저출산 여파를 이기지 못해 문을 닫았다. 올해 초에는 부산의 정관일신기독병원이 분만 진료 중단을 선언했다.

안전한 분만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분만기관 수는 700여개다. 이들 관련 단체는 분만병원이 사라지는 원인을 분만사고에 대한 소송 증가에서 찾았다. 저출산과 별개로 출산연령이 높아지면서 고위험 임산부가 늘어나고 분만사고 역시 많아졌다. 천문학적 배상액을 물어내야 하는 현실에 내몰린 산과 병원들은 분만을 포기했다.

김영주 대한모체태아의학회장(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2012년 도입되고 2023년 개정된 의료분쟁조정법 제46조는 산과 의사들에게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했고, 최근 천문학적으로 증가한 분만 사고 소송의 배상금은 분만에 대한 공포를 조장할 지경”이라며 “불합리한 사법 환경은 결과적으로 산과 지원율 급감과 분만 인프라 붕괴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낮은 분만 수가와 저출산 환경 속에서 산과 병의원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폐업할 수밖에 없다. 이 피해는 고스란히 임산부에게 전가되며, 임산부가 갈 곳을 잃은 지역이 전국 시군구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며 “산과 의사들은 365일 응급 전화를 받아야 하고, 주야간 구분 없이 일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또 소아청소년과와 마취과 전문의가 부족해 분만 병의원 운영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3월11일 서울의 한 종합병원 로비에 걸린 병원 홍보물 옆으로 의료진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분만병원들의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김 회장은 “전공의가 이탈한 후 어떤 교수님은 코피를 쏟으며 일을 한다. 아이들은 교수인 엄마를 마주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고 한다”며 “전공의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장에 있는 의사들도 매일 당직을 서다가 지쳐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 산과 의사가 그만둔 대학병원도 많다”고 했다.

홍순철 고려대 안암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최근 연휴 기간 야간 시간대에 25주 임산부가 지방에서 서울로 전원 되던 중 구급차에서 출산한 사례를 소개하며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도 한계에 달했다”고 짚었다. 조산 임산부를 받으려면 고위험 전문 산과 교수는 물론 응급수술을 위한 마취통증의학과 의사와 수술실, 신생아 중환자실, 그에 따른 인력이 갖춰져야 하는데, 비수도권에서 이런 뒷받침이 없다 보니 구급차에서 출산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홍 교수는 “제3세계 국가의 얘기가 아니다. 의료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이달 초에 벌어진 일”이라며 “대학병원의 분만 인프라마저 무너졌다”고 씁쓸해했다.

산부인과 전문의 인력난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산부인과 전문의 현황을 살펴보면 신규 배출 인력은 2008년 177명에서 2023년 103명으로 줄었다. 최근 10년간 산부인과 전문의 배출 수는 급격히 감소했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해도 산과를 선택하는 비율은 10% 미만이다. 그나마 있는 인력도 미용, 성형, 난임 등의 분야로 빠져나가고 있다. 

산과 교수들의 정년퇴임이 다가오고 있어 인력난은 심화될 조짐이다. 오수영 대한주산의학회 학술위원장(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임상조교수(펠로우)가 중도 이탈하지 않고 전부 65세까지 근무한다고 가정해도 2032년에는 교수 인원이 현재의 76%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며 “대학에서 산과를 가르칠 교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분만 인프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수가를 대폭 높여야 한다고 피력한다. 또 분만사고 보상 재원을 전액 국가가 부담하는 등 불가항력적 보상법의 전면 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신봉식 대한분만병의원협회장(린여성병원 대표원장)은 “산부인과 의사들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게 아니다. 5~10년 뒤 미래세대의 분만 인프라를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최후의 보루로 믿고 있는 대학병원조차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속한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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