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계의 숙원이었던 ‘간호법 제정안(간호법)’이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로써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의료행위를 보조해왔던 진료지원 간호사(PA 간호사) 1만6000여명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며 법적 지위를 보장받게 됐다.
하지만 여야 간 이견차가 컸던 PA 간호사 업무 범위를 별도의 조항으로 담지 않고 보건복지부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해 현장에 완벽히 정착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보건의료계 직역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해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간호사의 업무 범위 규정과 처우 개선 등을 담은 간호법은 지난해 4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바 있다. 당시 대한의사협회(의협)와 대한간호조무사협회(간무협) 등 보건의료계 직역단체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이어졌다. 이후 5월 본회의에서 재표결을 진행했으나 재적 인원 과반수 출석,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라는 요건을 넘지 못하며 폐기됐다. 민주당은 그해 11월 간호법을 다시 발의하기도 했지만, 수정된 문구가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보건의료 직역 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올해 5월 21대 국회가 종료되며 법안은 자동 폐기됐다.
폐기됐던 간호법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엔 정부의 의과대학 2000명 입학 정원 증원과 이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집단 이탈하면서 촉발된 의료공백 장기화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의정갈등 사태에 따른 인력난이 심화되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고, PA 간호사를 전공의 공백을 메울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부는 시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PA 간호사들이 검사와 치료, 처치, 수술, 마취, 중환자 관리 등 의사 업무를 일부 대신할 수 있도록 했고 법적 근거가 없는 PA 간호사는 1만6000명 규모로 늘어났다.
현행 의료법에서 의사의 지시가 없다면 간호사가 환자에게 간단한 환부 드레싱 처치를 하거나,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소염진통제를 처방하는 일이 불법으로 간주된다. 미국, 영국 등에선 PA 간호사가 법제화 돼 있지만, 국내에선 의도치 않은 의료사고가 나도 간호사들이 의료법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형국이다. 그러나 의료현장에선 의사의 위임·감독 하에 많은 업무가 간호사들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이 때문에 간호계는 간호법 제정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야당과 정부 여당도 전공의가 떠난 빈자리를 지키는 PA 간호사에 대한 법적 보호가 시급하다는 데 공감하며 힘을 실었다. 간호사, 간호조무사, 의료기사 등이 소속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이 오는 29일부터 전국 병원 61곳에서 동시 파업을 예고한 것도 법안 처리 과정에서 속도를 불어넣었다. 보건의료노조는 불법의료 근절과 간호사 업무 범위 명확화 등을 교섭 조건으로 내걸었다.
간호법 국회 처리는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지난 27일 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제1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간호법을 여야 합의로 의결했다. 28일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재석 290명 가운데 찬성 283명, 반대 2명, 기권 5명으로 통과됐다. 이주영·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고, 고동진·김민전·김재섭·인요한·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이 기권했다. 제정안은 공포 후 9개월이 지난 날부터 시행된다. 다음 달 국무회의를 거쳐 이르면 내년 6월 시행이 예상된다.
여야는 쟁점이었던 PA 간호사의 업무를 ‘의사의 일반적 지도와 위임에 근거한 업무’로 명시하고, 구체적 업무 범위는 임상 경력과 교육 과정 이수 등을 고려해 보건복지부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또 진료보조 업무에서 의료기사 등의 업무는 제외하되 구체적 범위와 한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했다. 아울러 간호 인력의 처우 개선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근무환경 개선과 장기근속 유도 등에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도록 법안에 담았다. 간호조무사의 학력 제한 폐지 부분은 이견을 좁히지 못해 추후 재논의하기로 했다.
간호법 최종 통과 직후 간호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한간호협회(간협)는 “간호법이 2005년 국회 입법으로 시도된 후 무려 19년 만에 이뤄진 매우 뜻깊고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간호 돌봄 체계 구축과 보편적 건강 보장을 실현해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됐고 우수한 간호 인력 양성과 적정 배치, 숙련된 간호 인력 확보를 위한 국가의 책무가 법제화돼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갈 토대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간호법이 국회를 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의료현장에 정착해 제대로 작동되기까지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우선 PA 간호사가 현장에서 전문간호사, 전담간호사 등으로 혼재돼 불리는 것이 통일돼야 한다. 현재 PA 간호사로 근무 중인 인력은 대체로 전문간호사가 아닌 전담간호사를 일컫는다. 전담간호사는 별도의 자격시험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문가호사는 마취, 응급, 중환자 등 특정 분야에서 3년 이상 임상 경력을 갖추고 대학원에서 석사 이상의 과정을 밟아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다음 달부터 전공의 공백 상태에서 정부의 ‘전문의 중심 병원 시범사업’이 추진되면 PA 간호사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법안 시행 전까지 지원책이 강구돼야 한다. 병원들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전공의 대신 PA 간호사를 착취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더불어 PA 간호사 업무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 간협에 따르면 의료공백 상황에서 현장 간호사 10명 중 6명이 전공의 업무를 대신하면서 관련 교육은 1시간 남짓밖에 받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보건의료계 직역 간 갈등도 난제다. 간호법 제정에 오래 전부터 반대해온 의협은 연일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의협은 “간호법은 직역 갈등을 심화시키고 전공의 수련 생태계를 파괴하는 의료 악법인 동시에 간호사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충수다”라며 “불법 무면허 의료행위가 만연하게 되고, 업무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데 따른 혼란이 예상된다”고 주장했다.
PA 간호사와 의료기사 등의 업무 범위를 복지부령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위임한 만큼 현장 혼선도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보건의료 정책에 정통한 한 의약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PA 간호사에 대한 적정 교육과 훈련이 기본 인프라로 깔린 상태에서 법적 보호와 책임 소재 부분이 시행령에 명확히 담겨야 한다”면서 “과도한 업무 범위에 대한 의료계의 우려를 불식시켜 나가면서 각 직능 간 업무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복지부가 잘 조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간호사 교육·관리·운영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간호법 제정으로 우수 간호 인력의 양성을 통해 수준 높은 간호 서비스를 제공할 근거가 마련됐다”며 “정부는 간호사가 전문 의료인으로 성장해 자부심을 갖고 일하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