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하는 시민, 귀 닫은 의사, 강경한 정부

절규하는 시민, 귀 닫은 의사, 강경한 정부

기사승인 2024-02-26 19:07:55
정부가 군병원 12곳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의 의료진이 응급실로 이송된 민간인 환자를 돌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환자 곁으로 돌아와 달라.”


시민도, 정부도, 심지어 대학병원 교수들조차 환자를 등지고 병원을 떠난 의사들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하고 있지만 닿지 않고 있다. 정부와 의사단체의 한 치 물러섬 없는 강대강 대치가 계속되며 시민들의 시름만 깊어져간다.

26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전공의(인턴·레지던트)들이 단체로 병원을 이탈하며 의료공백이 커지자 여성계와 아동계, 장애인계 등 시민사회에서 이들의 현장 복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아동복지학회는 지난 25일 성명문을 내고 “최근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나면서 치료가 필요한 우리 사회의 많은 아동들이 심각한 의료공백 상황에 놓일 위기에 있다”며 “생명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며, 특히 자라나는 아동들에게 적절한 시기의 치료는 아동과 가족의 삶의 질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전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도 “환자를 치료하고 목숨을 구하는 의료행위는 더없이 신성한 영역인데 위급한 환자들이 제때 수술이나 응급 처치를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며 “환자를 둔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환자 곁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호소한다”고 밝혔다.

장애인들은 안 그래도 진료를 받기가 쉽지 않은데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인해 어려움이 더 커졌다고 말한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평소에도 이동이 어려워 병원에 가기 힘들고, 지방에서 수도권 병원을 찾는 경우 외래진료 예약을 위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는 등 진료 자체가 제한적”이라며 “생명을 살리는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해 속히 의료현장으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간호사 등 의료 관련 직군으로 구성된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26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진료 거부로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아선 안 된다”며 전공의들의 병원 복귀를 촉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응급실, 수술실, 중환자실, 분만실, 신생아실 같은 필수 업무는 어떤 경우라도 유지돼야 한다”면서 “국민 생명을 위해 싸운다는 의사들이 국민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정당성도, 명분도 없으며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도 없다”고 경고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집단행동에 나선 전공의들이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열린 ‘대한전공의협의회 2024년 긴급 임시대의원총회’에 참석했다. 사진=임형택 기자


의료대란 우려…중재 나선 대학병원 교수들

보건복지부가 주요 100개 수련병원을 서면 점검한 결과 지난 23일 오후 7시 기준 소속 전공의의 80.5%인 1만34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들 병원에는 전체 전공의 1만3000여명의 약 95%가 근무한다. 이들의 사직서는 모두 수리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전공의 사직에 따른 의료공백이 심화되자 이를 지켜보던 교수들은 중재에 나섰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전공의들의 복귀를 위해선 강제가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며 교수들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갖자고 정부에 요구했다.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서울의대 교수협 비대위)는 26일 오전 긴급 회동을 갖고 “전공의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현장을 떠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돌리기 위한 대책은 협박이나 강제가 아니라 설득에 의해야 한다”고 했다.

성균관대 의대 교수들도 정부와 의료계가 3월이 오기 전에 타결에 나서야 의료재앙을 막을 수 있다며 양측의 양보를 제안했다. 성균관대 의대 교수협의회는 이날 “전공의들은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병원으로 복귀해야 한다”며 “정부와 의사협회는 먼저 2025년 의대 정원만 결정하고, 이후 여러 직군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구성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의하자”고 전했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은 “성급한 행동”이었다며 환자 곁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 대학병원 교수도 있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지난 2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을 통해 “사직서를 제출하자마자 병원을 떠난 것은 의협의 의사윤리 지침에 있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고 있는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며 “의사로서의 직업윤리와 전공의로서의 스승에 대한 예의, 근로자로서의 의무 등을 고려할 때 여러분의 행동은 성급했다”고 질타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이 환자와 보호자들로 붐비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의료 피해, 고스란히 환자들에

시민단체와 대학 교수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의사단체는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연일 불법행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예고하며 의료계를 압박하고 있고, 전공의들은 환자와 가족들의 절규에 귀를 닫고 의료현장을 등졌다. 피해를 보는 건 결국 환자들이다.

대전시 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23일 정오쯤 의식 장애를 겪던 80대 여성이 심정지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러나 의료진 부재, 중환자 진료 불가 등의 사유로 병원 7곳에서 ‘수용 불가’ 통보를 냈다. 그는 심정지 53분 만에 겨우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 도착했지만 결국 사망 판정을 받았다.

같은 날 오전 1시쯤에는 40대 남성이 경련을 일으켜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의료진 파업 등의 사유로 병원 8곳이 수용 불가 입장을 보였다. 25일엔 복통과 하혈 등의 증세를 보인 30대 외국인 여성이 병원 14곳에서 거부를 당한 뒤 3시간이 지나서야 대학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 신규로 접수된 피해 사례는 23일 오후 6시 기준 모두 38건으로, 이전 건수를 다 합치면 총 227건에 달한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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